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엡3;14-21 하나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 느헤미야강
  •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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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7() 새벽기도회

 

하나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3:14-21>

 

에베소서를 가득히 채우는 중요한 단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충만이고 또 하나는 풍성입니다.

충만하고도 풍성한 삶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이 충만하고도 풍성한 삶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열쇠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런 그리스도와의 사랑속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1.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전제-<속사람의 강건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도 그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랑을 그대로 받지 못하는 모습들을 목격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랑을 받는 그릇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에베소 성도들의 속 사람을 위해서 먼저 기도합니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인생의 노년을 앞두고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속 사람이 우리의 세월과 상관없이 새로워 질수 있습니까?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엡5:16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고,

5:18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충만하면 속 사람이 새로워 집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고 인생이 세월을 더 할수록

더 놀라운 감격과 감사의 삶으로 다가옵니다.

모세는 120세에도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34:7)고 증언합니다.

그가 거룩한 영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고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체험-<그리스도의 주인되심>으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속사람의 그릇이 준비 되었으면

이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 삶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삶의 문제는 예수를 구주로는 믿었지만

예수가 아직도 그들의 삶의 주인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비극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여기 계신다는 단어는 그리스도가 단순히 우리 마음에 존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왕좌에 자리잡고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원문에 카토이케오’(katoikeo)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와 유사하게 사용되는 단어에 파로이케오’(paroikeo)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꼭 같이 계신다, 거한다는 단어로 번역될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파로이케오는 주로 손님/나그네로 거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함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거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반면에 카토이케오주인으로 거한다는 의미입니다.

주인으로 거함은 의미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는 온전히 자유롭게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거함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가 주인되어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가 사랑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17)고 말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깊을 때 열매를 맺고,

건물은 터가 견고할 때 높이 빌딩을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열매가 없고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아직도 주님의 사랑안에 우리의 삶이 뿌리박지 못하고

터를 자리 잡지 못한 까닭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온전히 그에게 순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우리 마음에 모셨다면 그분을 손님 취급하지 마십시오.

그분에게 우리 인생의 집 열쇠 뭉치를 내어드리십시오.

그가 우리 마음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분을 진실로 주인되게 하십시오.

그가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다스려지게 하십시오.

그때 우리의 삶은 그분의 사랑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믿음의 건물을 높이 세워갈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그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3.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성숙-<그 사랑의 스케일>을 깨달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진실로 주님의 사랑안에서 세워져 가려면

그분의 변함없고 진실하신 그 사랑을 온전하게 깨달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18)고 권면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인생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합니다.

인간의 사랑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최대의 사랑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사랑은 세상 전체를 끌어안을수 있을 만한 넓은 사랑이 아닙니까.

존 스토트는 그의 사랑은 서로를 원앙(원수+앙숙)으로 대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품에 안을 만큼 넓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랑의 길이는?

성경은 그의 사랑이 영원까지 이어갈수 있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은 결코 멈출수 없는 사랑, 변질될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의 깊이는?

저 무저갱의 심연에 던져질만큼 타락한 죄인을 위해

음부의 깊은 곳까지 자비의 손을 내미시는 사랑이십니다.

그의 사랑의 높이는?

지옥에 던져 마땅한 죄인을 죄의 수렁에서 끌어올려

저 높은 하늘의 보좌앞에 죄인을 보혈로 씻어 드리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가 충만하면 아니 그의 사랑의 임재로 충만하면

주님, 이제 아무 것도 더 원함이 없습니다. 당신으로 족합니다.

저는 이제 충분하고 충만합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바울의 간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넘어서서

우리의 존재와 삶을 그의 충만하심으로 채우실 것이라는 찬양

곧 송영으로 말미를 장식합니다

20-21절입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의 황혼에 절박한 심정으로

아들 하나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만하면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넘치신 하나님의 사랑의 부으심이 아닙니까

아마 아브라함은 이 쏟아지는 별들을 세다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 모래 알을 세다가

하나님, 이만하면 됐어요. 전 하나님이면 충분해요하지 않았을까요?

성령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임하면 달라집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임재로 채움받은 우리가

정말 더 이상 원함이 없어진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