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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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토새; 내 삶의 plus ONE_단 3;19-30

  • 느헤미야강
  • 201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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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6 토요자녀특별새벽기도회

 

내 삶의 plus ONE <다니엘 3;19-30>

 

느브갓네상 왕이 엄청난 신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들에게 강제로 절하게 했습니다.

이 문제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고발당했습니다.

3;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느브갓네살 왕을 분노케 했습니다.

왕이 풀무불 가운데 던지라 명합니다.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맹렬히 타는 풀무불속에 던졌습니다.

본문에는 중요한 영적 포인트가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는데 2가지 변화됨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1. 우리가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을 깨트려야 합니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사전적 용어를 보면,

사람들 행동을 결정하는 잘 변화되지 않는 굳은 생각’.

또 다른 표현으로는 지나치게 굳은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고정 관념이 있습니다.

11장에 마르다가 죽은 오빠를 예수님께서 살리시겠다고 하자

11;39,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어요.

그러나 주님앞에서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는데

어떻게 사람이 살아날 수 있냐고 항변합니다.

마르다의 생각을 우리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죽기전에 고쳐주셔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제 주님 살리시겠다할 때 죽었는데 소용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입니다.

죽기 전에 살려야 은혜지 죽고나면 무슨 소용이냐.

망하기 전에 회복시켜 주어야지 망하고 난 뒤에 무슨 회복이냐고 합니다.

 

본문에도 우리의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에 던져지기 1초 전에

천사가 나타나 건져주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게 우리의 기대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세 친구들이 하나님을 붙들었는데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끝난것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인간적 고정관념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인간절망의 지점, 한계를 넘어서는 절망 지점인 풀무불에 떨어질때가

있는데 하나님은 그때부터 일하시기 시작하는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이런 방식으로만 일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능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위기 중 우리도 풀무불에 상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이 안 믿어지만 오늘 새벽예배 마치고 풀무불에

한 번 들어가보시면 됩니다.

바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를 믿으면 풀무불에 들어가도 안죽는다가 아니라

신앙의 원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바벨론 같은 세계에서 믿음지키며 살때 좌절, 낙심 올 때,

억울한 일 당할때가 있다. 그때 만나는 고난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 한계, 무너짐, 풀무불 같은 삶,

절망도 끝난다는 고정관념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 믿음 지키다가 경험하는 고난, 변장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느브갓네살 왕이 이들을 인정하고 세웁니다.

 

요셉도 동일합니다. 창세기 39장 형통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옵니다.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형통이라는 말이 계속나옵니다.

요셉 이미지하면 우리는 꿈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형통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형통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함께 보아야 할 것이 형통앞에 있는 전제입니다.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우리에게 형통은 고난이 끝나야 하고, 잘되어야 합니다.

감옥은 상상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형통이 무엇입니까?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형통이 아니라,

감옥가는 것 보고 그곳에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통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넘었습니다.

인간의 고정관념으로는 억울하게 눈명쓰고 감옥 가는 것을

형통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 감옥같은 곳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경험한다면 형통한 것입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2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너는 내 것인데 물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시고,

불 가운데로 지날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것이라! 그러니 위험한 근처에도 안가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 임재하심을 하나님의 형통으로 풀고 있습니다.

이것 깨달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있습니다.

 

찬양. 내 영혼이 은총입어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이 찬양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다니엘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고정관념, 선입견 깨어져

이 찬송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비난이 칭찬으로 바뀌어지는 반전을 경험해야 됩니다.

 

3;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예수쟁이들이 제사 안지낸다 하는

비난과 비슷합니다. 이 비난이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28, “부갓네살 왕이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돌보신

하나님을 찬송하여라. 그는 천사를 보내서 그의 종들을 구하셨다.

이 종들은 저희의 하나님을 의뢰하여, 저희의 몸을 바치면서까지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저희의 하나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도 절하여 섬기지 않았다”.(새번역)

12절의 격분 내용과 대 반전을 이룹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왕이 분노했고, 세 사람이 고난당했습니다.

28절은 30절로 반전이 됩니다.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빌론 지방에서 번영을 누리면서

살게 하였다.”(3;20)

신앙생활의 경험중에 비난이 반전 칭찬으로 바뀌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왕의 달라진 태도, 세상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2가지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압도해버리는 것입니다. 엘리야처럼말입니다.

아합에게 도전했고 선포했습니다.

왕상17;1 엘리야가 아합에게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18장에 바알선지자 850명과 대결합니다.

왕상18;38, ”그러자 주님의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태웠고, 도랑 안에 있는 물을 모두 말려 버렸다.“

엉청난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본문의 세 사람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우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풀무불에 던지면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결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향해

느브갓네살 왕이 무엇을 인정합니까?

3;30, ”세 사람을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엘리야처럼 불을 내려오게 하고, 바알선지자 850명과 싸워야만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기력, 힘없이 던져졌는데 느브갓네살왕의 인정을 받는 비결이 뭐냐?

플러스 원. 내 삶에 하나가 더해졌을때 강력한 힘 없어도

약해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요셉이 경험했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내 삶에 플러스 원이 있는 사람이 또한 인정 받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같은 파워가 있어야만 기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처럼 경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던져 졌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을 경험한다면

똑같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1;23 말씀이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임을 기억하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우리는 one plus one, plus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11월 한 달동안 품고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내 안에 잘못된 신앙적 고정관념을 깨트리게 하소서.

힘이 없고, 무력하게만 느껴지는 삶이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곳이 형통의 자리임을 믿고 나아가게 하소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이 이 믿음 갖고 기도하는 11월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