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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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9 환난과 나라와 참음

  • 느헤미야강
  • 20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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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새벽기도회

 

환난과 나라와 참음 <1:9>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9)

사도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환란, 나라, 참음에 동참하는자 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사도는 이미 너희 형제라고 쓰고 이어서 이렇게 씀으로써,

자신이 이 서신을 받게 될 일곱 교회의 성도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동료 형제일 뿐 아니라, 요한은 1세기 말의 성도들과 함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동참한다는 단어는 사귐을 의미하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함께 몫을 나누고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환난, 나라, 참음, 이 세 단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단어들은 나라를 중심으로 앞과 뒤에 동일한 개념을 두는 것입니다.

F.F.브루스의 설명입니다.

요한이 나라환난참음사이에 두는 것은 반복되고 있는

신약성경의 주제를 강조하는 것이다.

환난의 참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다.”

환난과 참음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라는 말의 의미에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나라는 왕권,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나라에 동참한다, 함께 참여한다는 말은 만왕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자로서 이 영광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즉 환난과 참음, 환난을 견디고 인내하는 것 뿐 아니라,

환난을 참는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일에도

성도들은 사도 요한과 함께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내혹은 견딤으로도 번역되는 참음이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이 강조하는 이김의 과정입니다.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에서 우리는

이기는 자에게는말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김의 과정에는 반드시 참음이 있습니다.

참음은 무력하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김이라는 렌즈로 볼 때 참음은 이기는 과정입니다.

이런 왕의 통치가 환난을 참음으로써 행사된다는 역설적인 개념을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난을 참고 죽으심으로써, 죽기까지 충성하심으로써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고,

고난 속에 감춰진 방식으로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아 온 천하만국을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과 참음 속에서 성도들은 나라(왕권)에 이미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환난을 참는 가운데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하다가 밧모섬으로 유배를 오게 된 것입니다.

요한만이 아니라, 배교의 위협과 유혹 아래 살아가는

1세기 말의 성도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은 패키지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14:22)”고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환난과 참음으로써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지금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환난 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 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환난과 참음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 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고난을 피할 길을 찾아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16:24).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고난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난이 신자들을 빗겨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신자는 주님을 따름으로써 세상의 미움을 받기에

더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이점에서 고난이란, 그리스도인이 겪어야 할 규범같은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과 참음에 동참함으로써 또한

왕권과 다스림에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하지 말고, 끝까지 참음으로 이 길을 잘 걸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라고 사도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도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언 때문에 오는 고난 뿐 아니라,

우리의 잘못과 연약함으로 빚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비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조차 다 용납하시고

우리로 그 고난을 참음으로써, 당신의 왕권적 통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왕권적 통치에

주님과 함께 참여하는 길은, 고난과 참음에 동참함으로써입니다.

 

고난과 참음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만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성도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난과 참음이 그들의 삶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들의 고난이 현재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 참된 지식 위에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서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환난을 끝까지 잘 견디어 예비된 영원한 복락을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 1세기 말의 성도들과 함께 우리들도,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영광스럽게 이 길을 걸어가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