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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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금) D6묵상,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면, 룻기 3;1~5
- 최고관리자
- 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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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의 주제를 한 마디로 ‘헷세드’입니다. 이 헤세드는 은혜를 베풀만한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가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입니다. 비이기적이고 남을 위해서 베푸는 은혜요 자기에게는 유익이 안되지만 그저 베푸는 은혜가 헤세드입니다.
3장에는 룻기의 주인공들 세 사람이 각자 나름대로 헤세드를 베풉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와 하나의 희망을 느낍니다. 며느리 룻이 보리 이삭을 주으러 나간 곳이 보아스네 밭이었고, 거기서 보아스와 룻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고, 보아스는 룻에게 이상하리만큼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선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일부러 보리 이삭을 흘리게 하고 룻으로 하여금 그것을 줍도록 합니다. 한 아베이면 요즘으로 30kg되는 양입니다. 처음 보리 이삭을 줏으러 간 날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룻이 집에 돌아와 모든 일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하자 그녀는 다시금 삶의 희망을 갖게 됩니다. 보아스는 자기 집의 기업을 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가 끊겨서 형수가 시동생에게 계대결혼을 요구하는 것이나,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친족에게 가서 가문의 대를 잇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스라엘 관습 상 당연한 권리이였고, 그것은 모세 때로부터 내려 온 율법입니다. 아마 이때부터 나오미는 살아갈 소망을 찾았고,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더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후로 룻은 철저하게 어머니의 코치를 받습니다.
오늘 3장에 들어오면서 무엇보다도 그 동안의 나오미의 삶의 태도에 변화가 있는 것을 봅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말합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며느리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룻이 떠나가 버리면 자기는 그나마 살 길이 막막해 지는데, 그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룻에게 새로운 삶, 즉 여기서는 ‘안식’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런 새 삶을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룻에 대한 나오미의 헷세드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본격적으로 룻과 보아스를 맺어 주기 위한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며느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나오미의 계획은 모두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지혜일 것입니다. 내용을 알고 보면, 대단히 위험하고도 자칫하면 오해를 받기 충분한 일을 나오미가 계획했습니다.
그 계획은 보리 타작을 하는 날은 축제날인데, 그 축제 날이면 늘 먹고 마시는게 관습이었습니다. “오늘 보아스도 그렇게 할텐데, 네가 단장을 잘 하고, 보아스의 침소를 알아두었다가 그의 발치로 들어가서 같이 누워라”. 참 대단히 무모하고도 외설적인 내용입니다.
이런 계획이 가능했던 것은, 만약의 경우에 보아스가 룻의 행동에 제동을 걸 경우엔 이것을 모두 다 나오미 자신이 뒤집어 쓸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오미의 생각엔 보아스만한 인품을 갖춘 사람이라면 한 여자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만한 상황에서 죽게 두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로서는 며느리를 위한 일생 일대의 승부수를 던진 셈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 기회가 몇 번 오는데, 내가 꾸준히 기도하다 보면, 성령께서 승부를 걸어라, 한 번 밀어 부쳐봐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룻의 태도도 대단합니다. 사실 룻도 시어머니의 말을 순종하는 대신 자기의 생각을 고집했던 여인입니다. 모압을 떠나 올 때 길에서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했을 때도 한사코 말을 안 들었고, 또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아무 대책없이 이삭 줏으러 간다 그랬을 때도 어머니가 처음엔 말렸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이삭줍기를 하러 나갔습니다. 룻의 마음 역시 헤세드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을 보면 마지막 당사자인 보아스 역시 헤세드를 베풉니다.
우리는 늘 내 일에 바쁘고, 인생의 중심에 언제나 내가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는 나의 삶의 관점을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내가 지행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타인을 위한 삶입니다.
룻기의 세 주인공들은 모두 자기 외에 다른 사람 입장만 생각합니다. 인생에 윤기가 돌게 하는 것은 이타적인 삶을 살 때입니다. 내 문제에만 묻히지 말고, 나는 힘들어도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삶을 지향할 때 인생은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지루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영광 받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들이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형통케 하십니다. 룻기의 주인공 세 사람이 다 행복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그런 일들을 찾아서 기도하며 나의 헤세드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화하고, 문자를 넣고 베푸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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