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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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2(월) D6묵상,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기로 결정하라, 눅7;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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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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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에는 울음과 관련된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1절 이하, 독자 아들이 죽은 과부를 항하여 울지 말라, 36절 이하 죄를 지은 한 여인의 눈물의 고백과 오늘 묵상본문 32절 울어야 하는데 울지 않는 장터에 앉은 어린아이들입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불쌍히 여기사....울지 말라....’(눅7;13)
주님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울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과부의 하나 밖에 없는 독자 아들이 죽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장 불쌍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신세가 불쌍한데 마지막 의지할 대상인 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앞이 캄캄해 지고, 살 소망이 끊어지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시신이 누워있는 관을 따라가며 울고 또 울었을 것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그와 함께 나왔다고 하니 울었을 것입니다. 내가 울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어주어도 그 울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마침, 주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주님이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관에 손을 대시니 죽었던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관에 넣어서 장례를 하러 가던 죽은 아들을 그 자리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는게 힘들어 절망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에 포기할까도 했으나 하나님이 소망임을 깨닫고 믿음의 길 가겠다고 겨우 다짐했는데 뜻하지 않은 고통의 상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 우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는 ‘죄를 지은 여인’(37절)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 그 발 곁에 서서 웁니다. 얼마나 우는지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았다고 했습니다. 죄인이 주님 앞에 서면 그냥 울음이 납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그 무한한 은혜 때문에, 그냥 눈물이 납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아 같은 것이 무엇이관대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그 길을 걸으셨는가? 십자가가 정말 믿어지면 예수님 앞에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감사해서 울고, 죄송해서 울고, 감격해서 울고, 염치없어서 울고, 알면서도, 믿는다 하면서도, 이렇게 밖에 안되는 나 자신의 못난 모습 때문에 울음이 납니다.
그리고 오늘 묵상 본문인 31-35절에는 울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2절). 이것은 당시에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 하던 놀이입니다. 어떤 아이가 피리를 불면 모두가 일어나 춤을 추어야 합니다. 누군가 곡을 하는 시늉을 하면 모두가 함께 울어야 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곡을 하여도 울지 않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꼼짝을 안합니다.
이 세대 사람들이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1절). 강팍한 심령들, 돌같이 굳은 심령들, 꽉 닫혀 있는 심령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심령들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듣고도, 예수님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듣고도 못 듣는, 보고도 못 보는, 만지고도 느끼지 못하는,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도 못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 앞에 서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예수님은 울지 않는 자보다,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1하)
여러분은 울고 계십니까?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에 계십니까? 예수님 앞에 서면 그냥 울음이 나십니까? 은혜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혹은 못난 나 자신 때문에 울음이 나십니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복 있는 자이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울지 말라....울지 말라....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 내가 너의 아픔을 아노라, 내가 너의 슬픔을 아노라...울지 말라....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를 울게 하신다면 내일은 웃게 하실 것입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내일 웃게 하시기 위해 오늘은 울게 하십니다.
슬픔 후에 웃는 사람들, 고통 후에 웃는 사람들, 환난 후에 웃는 사람들, 아픔 후에 웃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계속 울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는 동안 주님도 함께 울고 계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울고 계십니다. 울지 말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힘 내십시오. 오늘은 울지만 내일은 반드시 웃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알고 헤아리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지혜를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행동을 통해 그 유효성을 드러냅니다. 짧은 시간안에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자신들이 선택한 주님의 지혜가 옳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해도 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대중문화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믿는 자의 선택은 그의 의로운 삶을 통해 평생 동안 올바른 것임을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옳다는 것을 믿고, 이 길이 정당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오늘의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주실 유일한 분입니다. 이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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