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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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2장_사람을 기쁘게, 하나님을 기쁘게

  • 느헤미야강
  • 201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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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8() 새벽기도회

 

사람을 기쁘게, 하나님을 기쁘게 <살전 2;1-4>

 

데살로니가 교회가 위치한 데살로니가

마케도니아 지역 최대의 도시였고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돈이 오갔고 동시에 문화 교류도 무척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와 이집트를 비롯한 당시 유럽과 중동의 다양한 종교들이

그 도시로 흘러들어왔습니다.

그 종교들 대부분은 커다랗고 화려한 신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주요 종교의식에 참여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작고 초라한 모습을 지녔습니다.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변방 시골에 태어나 로마제국의 반역범으로

극형에 처한 한 남자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기독교의 복음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도행전 171절의 기록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교 회당이 있을 정도로 이미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단으로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늘 많은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3주 동안 머물며 전도한 끝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믿게 되었고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분노하며 야손의 집으로 찾아가

바울을 잡으려 하였고 바울이 없자 대신 야손을 잡아 끌고 갔습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교회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아테네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늘 미안함과 염려에 사로잡혔습니다. 18절 말씀처럼

여러번 가기를 원했으나 방문하지 못했기에 더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 남겨두었던 디모데를 고린도에서 만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염려대로 교회가 도시의 거대한 힘과 무게 가운데

여러 환난을 겪으며 망하고 무너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생히 살아남아 아름다운 복음의 공동체로 자라가고 있다는

반가운 이야기였습니다.

살전 1;6-8절 말씀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근심과 걱정과는 달리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비롯한 복음전도자들과 주님을 본받았습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데살로니가를 넘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다른 교회들에게도 모범이 되어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1;9절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두고 기뻐하며 감사한 까닭은

그들이 열심히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부흥하고 성장하는

소위 대형 교회를 이루어서가 아닙니다.

교인 중에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 힘을 과시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 한 없이 초라해 보이는 그 작고 연약한 신앙 공동체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소중하고

당당하게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신앙과 교회가

초라해 보일지라도 주님만이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이심을 진심으로 고백하였습니다.

 

22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라 말함으로 복음의 기원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복음으로 인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복음으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복음이 얼마나 기쁨이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바울이 모든 고난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2;4절에서 바울은 이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인데

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기쁜 소식이면 사람들이 기뻐해야 하는데,

왜 바울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참된 복음과 가짜 복음이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기쁜 소식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아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라면 병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면 키가 커지는 것이고,

학생이면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운동선수라면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이고,

사업가라면 사업이 잘되는 것이고,

정치가라면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종교인 이라면 자기 종교가 세계최고의 교세를

확보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것이 복음의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오히려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숨겨져 있던 죄들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사하시는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인데 이것을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 소식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에 관한한 사람들의 가장 근원적인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해주기에 기쁨이되지만

그것이 해결되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복음 안에 넣어두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은 율법 외에 주어진 의입니다(3;21, 1;17).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죄로 인하여 그 필요를 필요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의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것도 달라는 것입니다.

곧 다른 복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7-9절에 보면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가 임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싸움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 바울은 이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면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복음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은 것 외에

복음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인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생각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바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이 선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선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