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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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8장_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 느헤미야강
  • 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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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8() 새벽기도회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18;1-15>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 부르심을 받습니다.

너로 큰 민족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이되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적,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떠납니다.

보여주실 땅에 도착했고, 매 순간속에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큰 민족을 약속하셨지만 정작 자식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은 하나님 인도하심을 알았을 것이나 자식은 예외로 다가왔습니다.

창세기 15;1 나는 네 방패요 상급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아브라함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방패되신 하나님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 말은 완벽한 보호자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이 상급, 댓가되어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다 아브라함것이 됨을 말씀해 주셨지만,

15;2,3을 보면 아브라함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식 생각밖에 없습니다.

종 엘리에셀에게 상족속권을 맡기려 하자 네 몸에서 날 자라야 한다하시고

하늘을 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을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이번에는 사라가 자신의 몸종을 통해 자식 낳기를 제안합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후 10, 85세때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입니다.

그후 아브라함의 삶 13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13년이라는 기간은 이스마엘이 자라는 것 보는 것이 낙이었을 것이고,

이스마엘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13년은 아브라함을 향한 책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창17장에는 99세때 다시 나타나셔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바르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등진 삶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충분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를 충분히 인도해왔는데 왜 모자란 존재로 생각하느냐.

그리고 다시, 너를 통해 여러 민족, 여러 왕들이 나올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한 가문의 존귀한 자에서 열국의 아비, 어미가 될 것이란 뜻입니다.

충분하신 하나님이 이제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기 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름을 바꿔 주신 것은 이전 것은 잊고 새 사람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의 정신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나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이스마엘로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사라에게서 나올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8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신 장소가 마므레입니다.

마므레는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가축이 많음으로 헤어지게 된 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종과 횡으로 다녀보라 네가 걷는 모든 땅을 네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3장은 이때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한평이라고 더 가지려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예배했습니다. 마므레는 활발하다는 뜻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깊이 있게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18;1,2 아브라함이 마므레 장막 머물때에 찾아오셨습니다.

당시 유목민들의 거주지는 장막이었고, 더운 날씨로 정오에서 오후3시까지 휴식을 취합니다

아브라함도 장막안에서 휴식중일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성자예수, 두 천사로 이해합니다.

세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말 것을 간청합니다.

유목민에게 손님대접은 최고의 미덕입니다.

가죽샌들 신발이었기에 건조한 기후에서 발 씻김은 손님대접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세 스아의 가루로 떡을 준비하라고 요청합니다.

성인 20명 이상의 주식을 준비하게 하는데 손님은 3명입니다.

이어 종들에게는 송아지 요리를 하게 합니다.

7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살이 연하고 맛있어 보이는 송아지로 번역했습니다.

최상품임을 보여줍니다. 소는 가정의 재산과도 같습니다.

8절은 소 부산물인, 버터, 요구르트, 우유를 가져왔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주앉아 음식을 먹는게 아닙니다. 시중을 들었습니다.

 

천사들이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에 있느냐?’

지금 아브라함의 장막에 있는 것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미 모든 언약은 다 끝냈습니다.

당시 장막은 둘로 나누어 바깥은 거실과 사무실, 안쪽은 부인처소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함은 사라가 들으라는 뜻입니다.

10, 내년 이 맘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있으리라

11,12절에 그 말을 들은 사라가 내가 노쇠하고 아브라함도 늙었으니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도 웃었고 지금 사라도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정에 절말 웃음을 주셨습니다. 이삭을 주셨습니다.

13, 사라가 웃었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무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어쩌면 너와 그리 똑같냐고.

한 부인이 내 생에 최대 실수가 남편 만난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다녔습니다.

그 이야기가 돌고 돌아 남편 귀에 들렸습니다. 남편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부부가 오래사니 생각하는 것도 닮아가지 그랬답니다.

 

14절을 보면, 잉태할 것이라 하지 않으시고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스마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생식능력이 사라진 사라에게 너의 생식능력이 아니라

내가 주겠다 하시는 선언입니다. 현재 너희 몸 상태가 불가능해 보인다고

내게도 불가능해보이니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가서 깨우쳐 주십니다.

왜 크고 높으신 분이 이렇게 두 사람을 찾아가셔서 깨우쳐 주십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뜻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 사라가 아닙니까?

 

믿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것, 내 생각, 내 뜻을 이루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에 내가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길을 걸어 갈때 하나님이 도움 주셔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길에 내가 올라타고 그 길이 더 좋은 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우리가 종인데 뒤 바뀌면

우리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종이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청하면 우리 필요에 맞게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더 나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 가시려 오시는 것이지

내가 구한 것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이 크다는 것은 무슨뜻일까요?

내가 커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커지는 것입니까?

믿음이 좋다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저 사람 하나님께 받은게 많아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크심을 알고 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 큰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커지는 것은 내 능력이 커지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믿음이 적다고 꾸짖었습니다.

단 한번도 능력 작다고 꾸짖은적 없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실때에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제자들은 풍랑을 맞았습니다.

그때 다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을 깨우며 항변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믿은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배 안에 태풍보다 비교할 수 없는 큰 존재가 있는데

너희가 왜 나를 보고도 신뢰하지 못하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태풍이 커보이냐, 내가 커보이냐? 그 말씀입니다.

주님이 패풍보더 커 보이는 것을 믿음이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에게 멍청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신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꾸짖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딸의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대화중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 하시자

그럼에도 여인은 예수님향한 신뢰를 놓치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하시고 딸이 낫게 되었습니다.

여인에게 자신의 딸을 고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매몰차게 대하시지만 본래 그런 분이 아님을 믿은 것입니다.

딸 지배하는 귀신보다 주님을 더 크게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데

자기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내 계획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 생각보다 더 크신 분임을 인식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믿음이 좋아지다. 커진다는 것은 나 자신의 소유가 많아지고

지위는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어도 더 높아질수도 아닐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도 더 가질 수 있고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더 신뢰하는가가 최고 관권입니다.

믿음 좋아진다는 것은 사람은 작아지고 하나님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왜 찾아가서 깨우쳐주십니까?

아들 주시면 한 번에 되는것인데 왜 찾아가셨습니까?

그들을 깨우침으로 더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원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빨리 응답해주시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대에 주시기도 하시나 지연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오시 않으시거나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리려 하려는 것입니다.

세월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더 크신 분임을 인정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관심 대상인지 일깨워주십니다.

2020년 한 해를 살면서 점점 더 크신 하나님,

점점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