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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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장_나의 이제야는

  • 느헤미야강
  • 20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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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1() 새벽기도회

 

나의 이제야는<22:1-24>

 

창세기 2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 그 일 후에

이 말은 앞에 있었던 일이 뒤의 내용과 관계 있다는 말입니다.

21장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은 후

에셀나무를 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내용입니다.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개입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이 소망이 끊어졌다 할 때 전능한 하나님으로 오신 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내가 인생 살아오면서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올 때 도우신 하나님,

고비를 만날때마다 존 잡아주셨던 하나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한다면

오늘의 고난, 아픔은 낙망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1, ‘시험하시려고

시험은 누가 주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것은 파멸과 실족을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테스트인 시험이 있습니다.

학교에서의 시험은 실력을 점검하고,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험을 치러야 정답이 무엇인지 알고 실력이 늘게 됩니다.

하나님의 테스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훈련이 있습니다.

훈련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강하게 하기 위한것입니다.

 

1, ‘부르시되

하나님이 소리치신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아마르는 일상대화를 나누듯 이야기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하나님이 부르시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일상대화를 하듯이 부르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대답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테스트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함이 없으면서 하나님께서 응답함이 없으시네’,

하나님이 날 시험하네’, ‘훈련시키네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험문제가 무엇입니까?

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

100세에 언약의 약속으로 주신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합니다.

번제완전한 희생’,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왜 이 시험문제를 내셨을까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는데 그런 존재가 되려면

거기에 걸맞는 믿음의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믿음의 본질에 대한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사는 사람이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내 자식까지도,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조차도

하나님것임을 인정하고 드릴 수 있는가에 관한 시험입니다.

인간의 조건이 끝난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셨으니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가의 시험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드릴 수 있겠니?’

대화하듯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자녀가 하나님의 것, 내 소유임을 무엇으로 증명해줄래.

네 기업이 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임을 무엇으로 보여줄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소유임을 증명해 줄래!

네가 정말 나를 온전하게 믿는다는 것을 보여줄래.

 

2, 데리고

원문은 원컨대 데리고 가라입니다.

네가 원하면 한 번 데리고 가서 드려보지 않을래’. 이 말입니다.

이것은 선택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입니다.

3절 이하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읽찍 일어나 드림의 자리로 떠났습니다.

사흘길, 75킬로미터 쯤됩니다.

하나님은 권고했으나 아브라함은 절대 순종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야 돼’, ‘~하라하지 않으신것까지도

명령으로 받은 아브라함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은 권면하신 말씀에도 명령으로 받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5,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우리가, 복수 동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습니다.

드려도 살려주실 것 알았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생각한지라.

22;10, 이제야 네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나는 언제 그런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중요한 두 가지 양상을 봅니다.

첫 번째, 신앙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듯 죄를 떠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신앙이란 내가 제일 사랑했던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버리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기에 시험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말씀하듯,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첫번째 아브라함을 부르심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창22장의 부르심은 "구원 그 이후의 신앙"에 관한 물음으로

이 믿음의 여정헤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네 신앙이 진실한 것이냐?

너는 정말 그리스도인이냐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가지고 싶은 것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느냐 묻습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을 때에는 약속을 주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빼앗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이 요구는 하나님의 신비가 숨어 있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이 숨어 있는 요구입니다. 이삭은 단순한 이삭이 아닙니다.

이삭은 인류구원을 위해 오실 예수님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네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기로 결단했느냐.

나는 인류구원을 위해 내 외아들 예수를 골고다 언덕에서 죽이기로 결단했어.

나무 장작 걸머지고 모리아 산에 오를 때 네 마음이 아팠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내 아들을

나는 지켜 볼 거야.

칼을 뽑아들고 나무를 벌려놓고 그 아들을 나무 위에 올려 불사르려 할때에

칼을 내리치려 할 때에 네 마음이 얼마나 아팠니?

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그 아들이 피 흘려 부르짖는 모습을

나는 지켜 볼거야.'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이 요구는 잔인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잔인한 결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몰랐지만 그의 순종의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그 모진 결단을 창세기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는데 앞마당에서 바치면 어때요.

뒤뜰에 가서 바치면 또 어떻습니까.

그러나 모리아산에 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골고다 산에 올라야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곳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곳이 되기 때문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결단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면 죽고 나면 십자가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도 십자가가 아직도 무겁게 느껴지는 것,

신앙생활하고 헌신하고 교회생활하는데 힘겹게 느껴진다면 생각하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여러분 무거운 짐을 올려놓았을 때에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체에 태산을 올려놓아도 무겁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면 자기를 죽이고 나면

하나님 앞에 바치고 나면 십자가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면 질수록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모리아산은 이삭과 아브라함의 순종과 더불어 영광스런 동산이 됩니다.

골고다 언덕은 순종하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는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깨끗하게 순종하는 곳입니다.

십자가를 당당히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부르짖는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마음이 아파 고개를 돌리시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 칼을 뽑아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찌했을까요?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예수 믿었는데도 아직까지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습니까?

오랜세월 기도하며 몸부림했는데도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주지 않습니까?

이 일 좀 해결해 달라고, 다음단계로 나아가고 싶다고, 성숙하고 싶다고,

예수 닮고 싶다고, 이 문제 좀 해결해 달라고, 나도 복 받고 싶다고

하나님 앞에 오랜세월 매달리고 매달려도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주지 않습니까?

구원 그 이후의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13).

한 숫양이 수풀에 걸린 것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가시관 면류관 쓰시고 내가 목마르다 부르짖는 그 양입니다.

양 껍질 벗겨서 번제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옷이 벗겨졌습니다. 살이 찢겨졌습니다.

벗겨지는 그 양, 수풀에 걸려있는 그 양은 예수님이십니다.

 

번제를 다 마치고 죽이기로 결단했던 아들 이삭의 손을 붙들고

모리아산을 내려오며 아들과 아버지는 얼마나 감격스런 웃음을 웃었을까요?

순종했도다.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도다.

아들 이삭아. 이게 이삭이었구나. 이게 웃음이었구나.

아들 이삭을 줄 때에 너 하나 바라보고 기뻐한게 이삭인줄 알았는데

이 승리의 통쾌한 웃음이 이삭이었구나.

아브라함과 이삭이 웃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종들과 다시 만나 웃고,

네 사람이 집에 들어섰을 때에 집나갈때의 남편의 굳은 얼굴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아들과 돌아온 모습을 보고

사라는 어떤 웃음을 웃었을까요?

하나님이 이 웃음을 주시려고 이삭을 주셨는데 그 아들 바라보며

둥게둥게 웃는게 웃음이고 이삭인줄 알았더니 이런 멋진 웃음을 주십니다.

이 이삭을 통하여 인류를 웃게 만들고 지옥에서 고통의 절망에 부르짖는 영혼들,

천국에서 웃게 만들려고 이삭을 주셨습니다.

온 집안에 영광스런 웃음이 넘쳐났을까요.

이게 이삭인 것을. 하늘의 웃음,

신앙 구원 그 이후의 신앙으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