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특새(2) 애통하는 자_마5;4

  • 느헤미야강
  • 2019-11-13
  • 405 회
  • 0 건

20191113() 새벽기도회

 

애통하는 자(5;4)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치유하심의 3대 사역을

하시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목적으로

모여들게 되자 산에 오르사 제자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팔복에 이어 마5;13절은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려져

사람에 밟힐뿐이라 하심으로 팔복의 삶이 소금된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고,

다르게 살면서도 차원이 다른 행복을 누리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위로를 받을것이요.

세상 관점에서 애통하는 자를 고통이요 행복일 수 없습니다.

슬퍼하고 위로받기 보다 슬픔없이 위로받을 일 없는게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제시하는 바 우리 삶이, 행복기준이 하나님께 있어

하나님 자녀로 하나님 본 받는것에 있다면 애통함보다,

거룩한 슬픔보다 더 좋으것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통하는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습니까?

그들이 받는 위로는 무엇이기에 그리 말씀하실까요?

 

1. 애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애통하자는 펜테오(), 슬퍼하다. 근심하다. 슬픔의 여러 양상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죽은자를 위하여 애곡하는 데 사용된 말 중 가장 강한 표현입니다.

야곱이 요셉이 죽은줄 알고 슬퍼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의 복은 보편적인 복이 아닙니다.

모든 슬픔이 복이라면 이 땅에 아픔많고 사연많은 사람처럼

복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은 다른 복입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은 마5;3 심령이 가난한자의 관계에서 보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결핍, 없음, 무가치성을 아는 사람이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애통함입니다.

애통함은 영적 가난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영적 가난함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애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고 인식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애통입니다.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인격과

내 현상태 사이의 괴리감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나늬 연약성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실상을 목격하고 자기 존재의 심연을 본 사람은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여러분과 제가 자신의 참 모습을 순간적이나마 본 적 있다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얼굴빛에 드러내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비쳐오는 만물을 샅샅이 드러내는 빛 가운데

내 인격 행위를 살펴볼적이 있다면

겉을 가장 고상하고 훌륭하며 탁월한 사람이라할지라도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그 절규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세라는 것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가 무엇이며 결과도 무엇인지,

우리가 악행을 하고도 입술을 쓱 닦고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얼마나 손십게 말하는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애통의 깊이를

알고 있었던것보다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크리스천들의 신앙은 이런 애통함에 대한 체험이 부족합니다.

애통함이 없는 수백만, 수천만 그리스도인들이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의

참모습을 보고 행동을 애통과 연결시킨다면 충격받고, 정신차릴 것입니다.

더 늦기전에 이 충격을 받지 못한다면 더 큰 충격을 낳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저 높은 고지에 오르기 원한다면,

세상과 다른 행복 누리기 원한다면

저 낮고 낮은 모퉁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어두운 밤에서 목격했던 더럽고, 가증한 것, 정욕적인 것,

혐오스러운 것을 경배하고 있는지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길입니다.

다르게 살고도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애통하게 되고 주님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심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

내가 무엇을 말했는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했는가?'라고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해서는 안될 일을 했음을 발견한다면,

그 그릇된 행위를 생각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그는 여기서 멈춰 서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내 속에서 나를 이렇게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찌하여 나는 화를 잘 내는가? ­어찌하여 나의 성질은 이리 못된가?

­어찌하여 나는 내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일까?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불친절하고 시기 많고 악한 생각을 품는 것일까?

­어찌하여 나는 교만하고 이기적인가?

­그것은 내 속의 무엇일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7:15-24절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않는 바

악을 행하는 것이 내속에 거하는 죄라고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꼬’.

애통하며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이런것 때문에 만일 슬퍼하고 있다면 나는 참으로 애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애통하는 나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이런 애통이 우리를 하나님안에서 바르게 하고, 사랑에 감격하며, 행복하게 됩니다.

 

이런 애통함이 왜 중요합니까?

첫째, 내가 나의 모습속에서 죄성을 발견하고 애통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앞에서 겸손해 집니다.

마땅히 받을 존중, 존경, 경의를 요구하는 거만함,

오만한 태도는 사라지게 됩니다.

나보다 지나치게 행동하는 사람, 대동소이한 사람들에 대해

우리 판단이 관대해집니다.

동료들에 대한 자세,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땅의 물건들에 대한 욕심에서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게 만들어 줍니다.

 

보편적으로 복되게 하는 삶의 상태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재난으로 전보다 나아진 사람도 있고, 악화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외적 손실, 파산상태 같은 가난, 실망, 아픔통해

우리의 무가치성 깨닫고 하나님을 주목한다면 하나님이 복주십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참으로 애통하는 자는 자기 자시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듯 다른 사람을 봅니다.

사회상태, 세상에 관심 갖고 신문을 읽고 보는 것에서

단순히 혐오감을 느끼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의 불행을 보고 전쟁소문을 듣고 애통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자신 것이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임도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사로 무덤에서 우신 것,

멸망당할 예루살렘성을 보고 우시고 고통스러워하신 것은

죄라는 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성격, 죄가 세상에 들어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에 애통해야 합니다.

나를 보고 애통해하고, 다른 사람을 보고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죄로 멸망하는 것 보고

속이 아프고 마음이 답답하다고 렘4;19절에 고백합니다.

바울도 동족구원을 위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우리안에 이웃, 나라, 민족위한 애통함이 있는 사람이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애통함는 자리가 받는 위로가 무엇입니까? 위로 받을 것이요입니다.

슬픔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수도 어떤 수단에 의해 감소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치유책에 빠지거나 다른 일에 몰두하여 위로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 위로 받는 복은

현재적, 미래적 두가지 성격을 갖습니다.

하나는 현재에서 받는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주님의 다스림으로 위로 받습니다. 자기 비참함, 파산상태 인정,

애통하여 회개하는 사람은 예수를 찾고 임재를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의 주로 삼은 위로를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위로입니다.

위로를 받는다는 말은 파라클레테손타이로

곁에, 가까이서 부르다. 힘을 돋구다 는 말입니다.

우리 슬픔 아픔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곁에 계시니 큰 위로가 됩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으로 병을 치유하시기도, 연약한 것 강하게,

실망은 소망으로 격려로, 불안은 안심으로 바꾸십니다.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죄때문에 애통할 때 십자가로 위로 받습니다.

영적 빈곤감속에서 영광이 가득한 기쁨이 공종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사라지게 하고 악을 향한 고질적 성향을

우리의 본성에서 용해시키는,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손길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자녀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심령에 미칠 것입니다.

사람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애통해하게 되면

그리스도는 필연코 재빠른 응답을 보내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중에 누군가가 나는 왜 주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애통하셔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애통하고, 다른 사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애통하셔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약속인 위로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할 때,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애통에 대해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를 고난당하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애통할 때,

죄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 위로는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둘째, 미래에 받는 위로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면(벧전1:8). 저 천국에서는 그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천국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좋은 것으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7:17).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 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21:4).
이러한 위로에 대한 소망 자체가 또한 위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죄악의 깊이를 헤아리게 될 때

그 소망은 한층 더 밝아질 것입니다.

서쪽 하늘에 붉게 타 오르는 아름다운 노을이 완연히 비치게 되려면,

땅 위에 어둠 이 내리 깔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땅의 슬픔을 배경 삼아 하늘의 빛이 선명하게 채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