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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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새(5) 긍휼히 여기는 자_마5;7

  • 느헤미야강
  •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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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6() 특별새벽기도회

 

긍휼히 여기는 자 (5;7)

 

요즘 시대를 긍휼이 없는 시대라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도 동일합니다.

당시 헬라인과 로마인들은 긍휼과는 담을 쌓고 산 사람들입니다.

긍휼은 나약한 사람들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은 긍휼은 영혼의 질병이다.

약한 사람을 향해 긍휼한 마음갖는 것, 약한태도는 질병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대표적 긍휼의 대상인 노예를 살아있는 연장이다 했습니다.

노예는 사람 축에도 안들어갔습니다.

평생 부리던 노예 쓸모없으면 연장 버리듯 버립니다.

싫증나면 원형 경기장에 보내서 짐승 밥되어 죽게 합니다.

이것이 당시 시대 상황입니다.

 

예수님 당시 헬라인과 로마인들이 약자에 대한 인식이 이러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도 동일한 인식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 약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못 견뎌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이 시대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7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신앙생활이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다르게 살고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자녀 잘되는 것이 최고라는 세상 사람들과 동요되지 않고

한 분야에서 책임있는 지도자로 사는 것. 이것이 팔복정신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이 무엇인가하면?

세상사람과 똑같이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사는 삶을 살아갈 때 다르게 사는 사람에게 임하는

다른 행복을 누리는 것, 경험하는 것이 우리 사명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사명입니다. 어떻게요?

주님안에서 다르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같이 살아서 행복하다가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사니

여기에도 길이 있네. 행복하네. 이것을 구현해내는 것이 우리 사명입니다.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긍휼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세상과 다른 삶 살려면 이 말씀 묵상해야 합니다.

 

긍휼과 관련 회복해야할 것이 2가지 있습니다.

 

1. 공감차원에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여기다. 엘레모네스(,형용사).

이 단어는 불쌍한 사람을 향한 긍휼이 여기는 마음 상태입니다.

18장의 비유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이 비유는 두 대상을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10-13절은, 세리를 비난한 바리새인의 긍휼마음 없는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긍휼을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그의 삶을 보는 것,

즉 공감능력이라 했습니다.

그가 경험한 것을 내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상대방 어려움을 보며 내가 공감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영혼이 떤난 몸을 위해 운다면,

하나님 떠난 영혼을 위해서도 당연히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육신만 상대하는 것 아닙니다.

행복축제는 사람을 모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공감능력, 하나님 떠난 영혼을 위해 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모르는 영혼, 방황하는 사람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행위차원에서 긍휼을 회복히야 합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엘레모네스, 긍휼이라는 이 단어는 곤궁에 처해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감정을 넘어 다른 사람의 필요 다루고

그것을 완화시키는 행동에 대한 반응을 묘사합니다.

마음적 공감내포, 근본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엘레모네스라는 단어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이라는 책에서,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 ‘이라는 두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함께 고통받다는 뜻이라 했습니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 두려움, 혼돈, 공허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합니다.

비참함, 울부짖는 사람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눈물흘리는 사람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입은 자와 함께 상처입은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 요구한다.

긍휼이란 인간됨의 상태에 푹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은 마음씨 그 이상의 것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음에서 출발하나 함께 하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10;30-3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보고 마음 긍휼이 여겼고,

그 마음은 구체적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기름을 붓고, 싸매고, 돌보고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왜 성경은 제사장, 레위인을 등장시켰을까요?

요즘으로 하면 예배인도 하는 목사, 신부가 등장했을 것입니다.

마음 긍휼함이 중요하나 실제적으로 행위로 나타내는 것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으로만 교훈하시는 분이 아닌 3년 내내 그렇게 사셨습니다.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우리 공감해주세요. 우리 처지를 공감해주세요. 두 맹인이 따라와 외칩니다.

예수님 반응입니다.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공감해 달라는 요구에 예수님 행위로 보여주셨습니다.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아픔 공감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때마다 공감하셨습니다.

행위적 긍휼로 베푸셨습니다.

 

이에 반해 대조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아픔공감해 달라는 모습에 꾸짖습니다.

우리, 세상과 다른 길 간다는 것은 세상 방식과 달라야 함을 뜻합니다.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직역하면, 복되도다. 이미 행복한 상태입니다. 긍휼이여기는 자들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긍휼히 여김을 받아서입니다.

 

오늘 말씀앞에서 내가 그동안에 너무 냉정했네!

이렇게 끝나면 오늘 말씀은 강연일 뿐입니다.

다음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긍휼한 내면의 마음을 전제합니다.

 

2;3-5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내 마음에 긍휼이 일어나서 마음안에 회복되기 위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마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이 감격 회복될 때 행위 긍휼이 회복, 마음 긍휼도 회복될 것입니다.

 

예전에 신문기사를 보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긍휼의 극치가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아들에게 살해된 모친의 마지막 말, ‘옷 갈아입고 가라’.

평소에 잦은 음주로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많이 들은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아들이 그날도 텔레비전을 누워서 보고 있는데

또 꾸중하자 아들이 격분해서 의자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어머니는 피흘려 죽어가고 있는데 아들이 도망가려하자

그 아들을 향해 죽어가며 외친 말이 옷 갈아 입고 가입니다.

자녀를 향한 긍휼이 없으면 불가능한 말입니다.

자기를 살해하여 죽어가는 어머니가

피가 묻어 있는 옷 입고 가면 너 바로 잡힌다.

 

하나님이 왜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을까요?

네 안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진 긍휼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아이들 때문에 화나고, 속상할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참는 것은 내 안에 긍휼이 있어서입니다.

마음 가득 분노 있어도 시간 지나면 긍휼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땅의 모든 부모입니다. 우리 안에 긍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옷 갈아입고 가라는 긍휼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긍휼한 마음 가지라는 것은 우리안에 그 마음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라 말씀하신 것은,

우리안에 없는 것 가지고 하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나타날까요? 의지가 없어서입니다.

내 강팍함, 완고함의 벽을 깨트리면

우리는 그 안에 하나님 주신 긍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팍한 마음, 용서하고 싶지 않은 자기 의지 깨트릴 때 긍휼이 임합니다.

우리 십자가 구현하신 긍휼이 우리안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