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계2;18-29 두아디라 교회에게

  • 느헤미야강
  •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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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새벽기도회

 

두아디라 교회에게(2:18-29)

 

오늘 말씀은 네 번째 소아시아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편지입니다.

18,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지켜보시는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 크리스천이 많아져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분임을 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행위은 따로 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크기만큼 삶의 태도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날마다 의식할 때 가능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가장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만큼 칭찬도 많이 받고 책망도 많이 받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칭찬은 부러울 정도입니다

19, 나는 네 행위와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알고,

또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

주님은 네 행위를 안다하셨습니다. 어떤 행위를 아셨다는 것입니까?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랑믿음”, “섬김오래 참음이 있었습니다.

그 훌륭했던 에베소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 책망 받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단의 미혹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성도 간에 서로를 섬기며 지냈습니다.

핍박 속에서도 오래 참음으로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특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는 칭찬은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사랑, 믿음, 섬김이 잠깐 동안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이 처음보다 더 나은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끝이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가면 갈수록 처음보다 더 좋은 교회, 더 잘한 교회였습니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몰아치는 형편에서도, 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행하는

도시에 살면서도 주님을 더 잘 믿었습니다.

 

그런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20,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아합 왕의 이방인 왕후였습니다.

이웃 시돈과 평화를 위한 정략적인 계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정도로 타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에도 이세벨과 같은 여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여자가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한 것을 보면

특별한 은사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의 종들까지 가르치고 교인들을 미혹할 수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교회는 좋은 교회일 것이라는 생각도 착각입니다.

그렇다고 작은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말도 아닙니다.

은사나 능력이나, 교회 크기가 믿음이 좋은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은 마 7:22-23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던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경우는 주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벌써 있었습니다.

9:38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께 나와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라고 말한 부분이 나옵니다.

주님은 마 24:24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하시며 표적과 기사를 이용한 마귀의 미혹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지금도 부흥이 일어난다는 나라마다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8절 주님은 눈이 불꽃같은 분이라 했습니다.

겉만 보지 않고 중심, 곧 영적 실상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도 주님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시 가장 거룩한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책망하신 이유도 그들의 겉 행위가 아니라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5:4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러므로 주님은 이세벨이 얼마나 사악한 자인지를 아신 것입니다.

 

당시 어느 도시나 장사하려면 그 도시의 상인 조합에 소속되어야 했습니다.

어느 도시의 상인조합이든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한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두아디라에서도 예수님을 믿게 된 교인들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세벨은 우상숭배, 음란한 일에 참여하는 것도 괜찮다고 한 것입니다.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돈 많이 벌어야 헌금도 많이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미혹이었고 음란이었습니다.

은사가 강한 이세벨이 그래도 된다고 하니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에 빠져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두고 보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은사는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주신 능력입니다.

은사는 교회 안에 생기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은사 사역에는 영적 미혹도 함께 일어나기에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21절에서 주님은 이세벨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이세벨이

돌이키지 않자 무서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22-23절에서 병상에다 던지겠다’, ‘큰 환난을 당하게 하겠다’,

그의 자녀들을 반드시 죽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 악한 영이 성령을 가장하여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분별해야 할 종들까지 이세벨의 은사에 미혹되어 그를 떠받들고

그에게서 배우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세벨에게

미혹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세벨에게 미혹되지 않은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24). 

주님은 그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4...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25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나중 행위가 이전 행위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27-28절에서 주님은 이처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가진 성도에게는 온 민족이 심판을 받을 때,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샛별을 주겠다약속하셨습니다.

샛별은 예수님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누려지는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계신데 꿈에서 보고 들판에서 본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엘리야가 낙심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산 앞에 세우신 후

강한 바람이 불게 하시고, 지진이 일어나게 하시고,

불이 임하게 하셨으나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엄청난 체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평소에는 힘도 없고 감격도 없다가 큰 기적이 일어났을 때,

펄쩍펄쩍 뛰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구나!” 호들갑을 떠는 이들이 많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셨다가 그 순간에 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언제나 우리 안에 임하여 계십니다.

주님하고 불러진다면, “아버지하고 불러진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능력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기사와 이적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마음에 모신 것이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능력임을 확신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