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계3;1-6 사데교회; 살았으나 죽은

  • 느헤미야강
  • 201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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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2() 새벽기도회

 

사데 교회; 살았으나 죽은(3;1-6)

 

사데 교회에 오신 주님의 모습은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사데는 내륙도시로 직물공업이 발달한 도시였고

사금으로 유명해 상업적으로 번성한 도시입니다.

대부분 높은 암벽으로 되어 있어 적으로부터

단 두 번 밖에는 점령당한 적이 없을 만큼 완벽한 도시였습니다.

자신들의 삶의 자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다보니 게을러지고 나태해졌습니다

도덕적으로 문란하게 되고, 퇴폐적인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칭 거짓선지자나 이단의 공격이 없다 보니

신앙생활에도 별로 열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름뿐인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주님은 사데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오늘 사데 교회에 대하여 너무나 간결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1)

교회의 조직은 있는데, 건물은 있는데 그 안에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면서 적용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사데 교회가 겉모양이 화려했던지, 큰 교회의 모습일 수 있었겠다.

예배도 있고, 성경공부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갈망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행정적으로 시스템적으로 완벽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에 성령의 역사와 사랑과 수고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없다 거룩하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교회의 거룩성의 문제입니다.

거룩함을 지향하는 것과 거룩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지만

거룩의 능력을 상실할 때 이름은 있지만 죽은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처럼 치명적인 책망이 있을까요? “죽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믿고 있는데,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죽었다고 선언한다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죽은 것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가장 절망적인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아파야 하는데, 고통을 느껴야 하는데 아픔도 고통도 못 느낀다면

그것이야 말로 죽은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모양은 있지만 아픔을 느끼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혹은 누가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 아닐까요?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며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는데 죽은 상태입니다.

 

이름은 있지만 죽어 있는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영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교회에게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가는 곳에 영적인 갈급함이 일어나야 하고,

빛이 가는 곳에 어둠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살아 있지만, 존재감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에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님,

일곱은 완전수로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면,

모든 교회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은 다니엘 12장처럼 사람들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일꾼일 수도 있고 어둠을 밝히는 존재 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별을 가지신 분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이 주님이 네가 살아있으나 죽었다고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칭찬할 것이 없는 책망 받는 교회였었습니다.

하지만 책망으로 끝나지 않고 역시

그 교회에 대한 기대로 결론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주님게서 사데 교회에 소망이 있고, 기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스라엘이 가장 패역하고 소망이 없어 보이던 때를 의미합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하나님께서 걸출한 선지자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동일한 환상을 주셨습니다.

남겨진 그루터기, 남겨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하지 말자.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신경쓰지 말자.

모인자 중에서 쓰임받는 자들이 있으면 되고,

기도하는 자 중에 쓰임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 받는 자들을 통해 오는 새로운 부흥이 살아 있는 부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모두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그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은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겨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 남겨진 그루터기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보시고

홍수로 멸망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의 가정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모든 사람이 위선적일지 몰라도 거기에 더럽히지 아니한 몇 사람이 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했다!"라는 말은 세상의 유혹에 물들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열정과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도들로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에 너무나도 문제가 많던 우상숭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던 성도들을 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모습을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 일곱 영이 그분의 오른손에 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생명이 그분에게 있습니다.

무엇이 소망입니까? 영을 가지신 그분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가 그분의 영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멀어진 교회는 필연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데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다보면 밖으로

커다란 아데미 신전의 기둥이 보인답니다.

사데 교회가 예수님의 질책을 받으며, 지금 그 터만 남아 있는 이유가 있다면

신전 옆에 세워진 교회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때문에 신전이 없어져야 할 터인데

공존하며 교회의 영향력이 나타나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우리 옆에 존재하는 우상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우리 옆에 서 있는 거대한 기둥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민감성"의 문제입니다.

너무나 편안하고 부유한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경계할 것이 없는, 민감함이 사라진 그들에게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타락한 모습, 아니 영향력을 상실한 교회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기대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사데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경건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구제를 했고, 오래 기도했고,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금식한 표를 내기 위해 얼굴을 흉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 것이다.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했습니다(23;27,28)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어떤 잘못을 지적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딤후 3:5)

이러한 행위를 한 단어로 말한다면 위선입니다.

바로 이런 위선이 우리 예배 가운데 우리 신앙 가운데 스며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한 기대가 무어십니까?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생각할 것이 있고” “지켜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도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 신앙인의 문제입니다.

믿음을 점검하기 위해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은혜 받았던 때의 기쁨과 감격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

은혜를 받았을 때 잊어버렸던 과거의 습관을 다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죄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뿌리 깊은 윈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경향이 우리 속에 끊임없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와 기억은 죄로 돌아가려는 우리를 잡아주는 버팀목과 같은 것입니다.

 

은혜의 삶을 산다는 것은

팽팽한 영적 긴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평안함과 기쁨입니다.

은혜의 생활을 한다는 것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회개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때가 언제 이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심판이 날들이 도둑같이 이르면 인간의 목숨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의 많은 사람이 옷을 더럽혔지만, 거룩함을 지키고 회개한 자들,

즉 흰옷을 입은 자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합당한 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교회의 명부에 있어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지 않겠다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과 우리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축복중이 축복입니다.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인하다!’(호몰로게소,)법정에서 진술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끝까지 깨끗함을 유지한 자를 주님이 인정하시며,

하늘의 모든 이가 알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거룩함과 신앙인의 노력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최후의 승리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