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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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3;14-22 라오디게야 교회; 열심 vs 미지근함

  • 느헤미야강
  •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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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6() 새벽기도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열심 vs 미지근함 <3;14-22>

 

오늘 본문은 소아시아 7교회중에 마지막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14)

라오디게아에 찾아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아멘이라는 말이 실로, 참으로라는 뜻입니다.

충성 되고 참된 증인인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보증인 동시에 심판의 경고입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차지도 뜨겁지도.”라는 말은 지역의 특징을 알면 이해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라오디게아라는 지역은 빌라델비아라는 곳에서 동남쪽으로

72Km 정도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양털로 옷감을 만드는 산업과 금융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이런 풍요가 있었지만,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를 못해서

이웃도시에서 물을 끌어다가 사용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얻어 사용하는 물은 온천수와 지하수였다고 합니다.

도시 북쪽으로 11km 정도 떨어진 곳이 히에라볼리라는 곳인데

이곳에서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은 골로새라는 지역인데

그곳에서 지하수를 공급받았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물을 공급받다 보니 이들이 물을 마실 때가 되면

뜨겁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환경이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성격이 적극적이지 못하고 늘 미온적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경향이 교회에도 그대로 드러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 훌러 신학교에서 맥가브란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깨서 활발하게 일하는 교인이 대개 10%입니다.

살짝 자는 사람이 80%입니다. 그리고 푹 자는 교인이 10%입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10%의 깨어 움직이는 교인들과

활기차게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살짝 자는 80%를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푹 자는 10%는 건드리지 말이야 합니다."

푹 자는 사람 10%를 깨우면 깨고 나서 신경질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교인이 교회마다 80%라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편지를 가만히 보면

이 교회가 가진 특별한 오류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단에 감염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이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온적인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이 무엇입니까? 17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이 자신의 만족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뜨거움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갈급함이 없는 자에게 어떻게 열심과 헌신이 나오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만족했던 것 같고,

이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척 부유했습니다.

주후 60년경 당시의 도시들이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도

라오디게아는 로마에 관례적 보조금을 청원하지 않고도 재건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상업 금융의 중심지로서의 자부심,

유명한 의술 학교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교만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전염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만의 영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만족하게 하고 열심을 앗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모습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쓰신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국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이 교회의 소속 교인은 4,366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였습니다.

하루는 스펄전이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12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66명이 있다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신자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험악한 세대를 이기려면 주님과의 관계가 뜨거워야 합니다.

이것만이 이기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과 뜨거워질 수 있을까요?

바울처럼 항상 자기 부족을 인식하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만하면 됐겠지!”하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앞에 있는 것을 놓고 나는 부족하다. 더 뛰어야 해.

더 은혜를 받아야 해. 더 기도해야 해라고 안타까워하는 자세를

일생 유지하면 그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교회 지도자나 이와 같은 발전, 개혁, 자기 수정,

자기 부족을 느끼지 않고는 마음이 금방 식고 맙니다.

내가 안고 있는 이런저런 시험 꺼리들이 실상은

영적으로 식어버린 데서 생긴 부작용은 아닌지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꿈이 아닌, 나의 꿈이 이루어지면 만족하는 사람들이

쉽게 타락할 수 있다는 것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역동성은 매일매일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편안함으로, 우리의 욕망을 이루는 것으로

식어 버린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역겁기까지 해서 주님은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하십니다.

 

나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편안하고 자식들은 잘되고 있습니다.

교양 있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주일은 크리스천인데, 세상이 누리는 것도 다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시니, 그들이 너무나 비참합니다.

영적으로 치유 받아야 하는데 자신들 스스로만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했습니다.

 

사실은 그 모습이 영적으로 얼마나 빈곤한지 보라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 같으나 아무것도 없이 피폐한 영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세상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영적인 세계에서 그들은

너무나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실 뿐입니다.

 

본문에 주목하십시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보고 있는데 자신들만 모르는 것입니다.

 

본문 18-20절입니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권면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부요함이 아니라 불로 연단하여 얻어진

금 같은 순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때로 우리의 삶과 신앙에서 적극적인 고난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훈련의 장소에 내가 들어가야 합니다.

사단은 늘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편안하자, 좀 더 즐기자.”

적극적인 연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는 때에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또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18)

순결함과 거룩함은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만족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는

거룩함에 들어간 사람, ‘순결함을 지킨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또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8)

, 지금의 육신적인 안목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에 승리하려면 영적인 눈으로 보고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올바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영적인 눈이 떠져야 올바른 판단을 합니다.

 

영적 유혹을 이기기 위해 오늘 본문은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미지근함을 책망하시고 그 처방은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열심의 반대는 미지근함입니다.

열심을 내는 방법은 회개이고, 주님과 깊은 영적교제와 사귐입니다.

주님이 결론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본문 20절에 귀결이 됩니다. "어떻게?"에 대한 문제이지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하려면 회개를 해야합니다.

교제하고 싶으셔서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계시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음성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이 내 안에 계시나 깊은 영적 사귐과 교제를 통해서

내 영의 눈이 띄여 나의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다시 열심을 품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과 함께 다시 회복되어 열심히 있는 주의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