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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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9;11-21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 느헤미야강
  •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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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새벽기도회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19;11-21)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이 우주의 역사는

그 언약의 성취를 향해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제한된 시각으로 볼 때 지금 우주, 온 지구는 답이 없어 보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신의 자녀들과

영원히 사시고자 하는 우리 주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속에

움직여지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쉬지 않고 지금도 열심히 우주와 역사를 경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반드시 승리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열심을 알고 있는 우리가

지금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요한 계시록 19장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고

두 번째 이름이 12절에 있는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입니다.

리고 세 번째가 13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이고

네 번째가 16절에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입니다.

오늘 분문 12절에 보면 조금 이상한 이름이 나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히 호칭이 아닌 존재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노아 모두 그 이름의 내용을 삶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 이름이 비밀이다라는 말은

그 존재의 내용이나 그 존재가 하는 일이 외부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6:3절을 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4-7절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게 될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여호와로 알리지 않으셨다고 하십니다.

4: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미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나오는데

하나님은 족장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이미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그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인 줄은 알았지만,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진 언약과 사랑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이 담고 계신 내용은

출애굽기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과 함께

홍해를 건너심으로써 비로소 그들에게 경험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전까지는 이름은 알고 있으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비밀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계시록 19장에 여호와의 이름이 비밀이었다는 것은

절대로 우리 주님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우주의 역사와 종말은 우리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밀이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는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이시며

그러한 분이 쏟아 놓으시는 이 역사의 내용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비밀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천지는 어떻게 창조가 되었는지, 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택해졌는지,

왜 예수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셨어야 했는지, 왜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예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비밀인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늘의 비밀은 아주 일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실 지,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그 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게 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막연히 추측하거나 상상할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이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이나, 기대, 욕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달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시적인 역사조차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 중의 하나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일과

그 일을 이루시는 방법, 또 하나님 언약의 완성의 시기가

우리가 감히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영역이라면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항복, 충성, 순종이 정답입니다. 그 분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충성의 내용이 뭡니까?

선교하고, 헌금하며, 구제, 봉사 등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것들은 1차적인것들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1차 적으로 먼저 해야 할 것을 주님은 성경을 통해 제시하셨습니다.

이 말을 요한복음, 마태복음, 호세아서를 이 한 문장에 다 넣으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주 너의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그 분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그 믿음이 너희를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자로 성숙시켜 갈 거야,

그러니 나를 알아라, 힘써 나를 알라

우리는 그 비밀이신 하나님 앞에서 두 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하며

저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유일한 할 일인 것입니다.

내게 허락될 그 영생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던져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그 생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들이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 자신들의 생존의 문제에만 꽁꽁 묶여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나의 생존이나 생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존의 문제에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생존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생존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영생)을 얻고 거룩한 백성으로 준비되고

살아가기 위해, 사명감당하는 존재로 살기위해 필요한 시간 동안, 부르심의

그날까지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환경일 뿐이지,

그 생존의 문제가 나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6;24)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너희가 너희의 생존에 집중하게 되면

생명의 문제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존의 문제가 아닌 생명의 문제에 집중을 하게 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사건이나 상황, 환경, 조건 등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처한 그 상황과 조건이 자기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데 있어서 가장 최선의 상황이며 조건이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내가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일체 비결을 배웠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생명에 집중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시도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화려한 보석으로 꾸며진 천국도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천국의 화려함때문에 하나님을 믿어 드리고 있으시다면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만나고 싶어서 그 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아무 상관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시킵니다.

자기가 원하는 생존의 도구들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졸라대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오직 그 분께만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소홀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긴 들었지만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은 나의 생존에 유익이 되는,

현재 나에게 시급한 세상일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에게 유익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지금 생각에는, 예수님은 내 인생 동안에는 절대 안 오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안됩니다.

 

그런데 세상일은 열심히 하면 당장 나에게 유익이 옵니다.

거기에 반해 기도, 예배, 설교, 신자다운 삶이런 것들이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자꾸 뒤로 미룹니다.

조금만 있다가 하지 뭐, 벌써부터 준비하는 것은 나에게 손해야그럽니다.

신앙생활은 나중에 열심을 내어 해도 되는 것이지만

돈은 지금 못 벌면 안 되는데, 예배는 나중에 드려도 되지만 이번 주에

안 놀러 가면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이 한 조각 날아가 버리는데,

그러니까 나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은 그때가서 하고 지금 당장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하자그렇게 생각합니다.

 

혹자들이 예수님 십자가 곁에 달렸다가 구원을 받은 강도를 부러워합니다.

그 강도와 죽도록 매 맞고 배신당하고 순교당한 바울중 누가 더 행복할까요?

사도 바울이 훨씬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교제하며,

또 그 분을 기다리며 사는 그 삶이 바로 천국이고 행복이며

신자의 기쁨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세상적인 나의 유익을 얻어내는 종교로만 생각하니

바울은 불행한 사람이고 강도는 땡잡은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 매일 매일을 주님이 계신 것처럼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장차 내가 들어가게 될 어떤 공간적인 곳으로만 여기시면 안 됩니다.

미리 지금부터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랑이신 예수, 나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가신 그 예수가

진짜 내 안에 계심을 믿으시고 천국 백성답게, 신랑을 만난 신부처럼,

주인을 만난 종들처럼 그렇게 오늘을 준비하며 사셔야 합니다.

그게 비밀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그 상상 할 수도 없이 엄청난 주님께

항복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 분께 충성하며 사는 천국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준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