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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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22:1-8 새 예루살렘성과 생명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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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강
- 20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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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7(토) 새벽기도회
새 예루살렘성과 생명수의 강 <계22:1-5>
계시록 21:1,2절에 나오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계21;9,10절에 의하면 ‘어린양의 신부’, ‘하나님의 백성’, ‘교회’입니다.
계시록 21장 후반부에는 장차 올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처럼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보석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이어 22장 본문에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성도요 교회이며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면 그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생명수의 강이라는 메시지가 됩니다.
이 장면은 동산 중앙에서 강이 발원하여 흘러간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서 47장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물이 흐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겔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회복된 에덴과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
새 성전이 성도안에 구현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성전에서 물이 흐릅니다.
본문 1절에서는 그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릅니다.
성전은 계21;22절에 의하면 ‘하나님과 어린양’입니다.
에스겔서 47;1절이 오늘 본문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충만하게
흘려 보내주시는 생명력을 성경은 ‘바라크’, ‘복’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이제 그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복’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수의 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들이 이미 이 땅에서 그 ‘복’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팔복은 전부 ‘복이 있는 자여’로 시작합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살고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이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보여 지는가를 설명하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 이미 영적으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흘러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성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미 이 땅을 살고 있는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존재하는 우리 성도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이미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말인데 그 생명수가 도대체 뭡니까?
그 생명수는 어떻게 다시 우리 성도들에게 부어지게 됩니까?
답은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수입니다.
요4장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여인이 그 샘물을 달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하는 샘물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이 땅에서의 것을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 꼭 이 사마리아 여인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수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그 예수님에게 자기 육신의 목을 축일
기적 같은 물만을 구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생명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 여인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서 자기 목을 축이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이게 바로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흐르는 성도의 모습 아닐까요?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 물동이를 들고 ‘이 물동이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기적 같은 물을 채워주세요’ 라고 칭얼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인 물동이를 버리고 예수라는 그 참 생명수를
세상에 소개하고 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세상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1-12절은 예수안에 생명이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 안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어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에 목숨을 걸고 삽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지 그 예수를 이용해서
내 육신의 목을 축이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실과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그 생명수가 예수 십자가로 우리에게 다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땅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삶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바로 산상수훈의 팔복의 내용을 사는 사람들입니다(마5:3-12).
몇 가만 살펴보아도 그 의미를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상의 것이 비워지고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바보라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진짜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애통’, ‘펜데오’는 복을 받아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면서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처사를 감당해 내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손해보고 내가 양보하고
내가 져 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말 ‘프라우스’는 ‘하나님께 길들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환경이나 처지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벗어나
하나님의 ‘의’로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복을 받게 되면
그 ‘의’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무엇일까?’로 나타납니다.
당연히 그들은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상 적인 욕구를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복 받은 사람, 생명수의 강이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의 삶입니
다. 이 팔 복을 합쳐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입니다.
팔 복을 한 데 넣고 은혜의 찜기에 넣고 한약 우려내듯이 내면
걸러 나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복을 받고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삽니다.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워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땅에서 그 삶을 훈련하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 어떤 아픔과 눈물이 없는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으로 살아 내야 하는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의 원리는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반대로 복 받은 새 사람들은 세상것을 자꾸 포기하고, 양보하고,
져 주면서 그 ‘힘의 원리’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 힘의 원리를 벗어나서 나 말고 하나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십자가’라는 삶을 이 땅에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받은 자들의 삶은 고단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떤 삶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그림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곧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그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구유에 오셨는지 아십니까?
왜 그렇게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가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외형을 보고 ‘난 당신의 백성입니다’라고 따르는 자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려내기 위해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황제로 오셨다면 세상 전체가 그 분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가지신 힘과 재물을 따라가는 것이지
영원한 생명수이신 구세주를 따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 그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명수를 발견해 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그들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눈에 보이는 번영과 행복이 찾아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일을 하신다면
누구나 다 예수를 믿겠노라고 나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골라내시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
십자가를 걸림돌로 두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그 십자가에 걸려 넘어져 버립니다.
가짜들은 십자가 앞에서 이내 포기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있는 사람들은 힘이 든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힘내십시오.
그 십자가 너머에 우리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록 지금은 그 십자가 너머의 세상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열심히 그 길을 가십시오.
그들이 진정 그들의 속에 생명수의 강을 소유한 자들이며
그들이 결국 영원한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계22:3,4,5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눈을 들이 이곳을 바라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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