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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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12-20 영광의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 느헤미야강
  •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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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새벽기도회

 

영광의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1;12-20)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시려고 사람에게 주신 계시입니다.

사람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지금과 같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성된 뒤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알리시기 보다,

그 일을 성경 안에 제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살았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쓰기 위해서도 그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고 또한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을 뵈옵는다는 것(6:5;10:8-9;17:6;33:19,22-23)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 중에는 이사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

또는 다니엘 선지자와 같이,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그 영광을 환상 중에 목도한 사람들이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세 제자가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뵙기도 하였습니다(17:1-8; 9:2-8; 9:28-36).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과거에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방식으로, 사도 요한이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뵙는 환상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입으신 당신의 모습을 요한에게 보이신 것은,

요한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1절에서 보았듯이, 이 모든 계시는 그 종들(성도)에게 보이시려고

먼저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입니다(1:1).

그래서 주께서는 네가 보는 것을 기록하라고 하셨고(1:11)

19절에서도 네가 본 것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1:19).

구약의 선지자들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환상 중에 뵈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거의 죽음 같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에스겔은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뵈었을 때, 엎드렸습니다(1:28).

엎드렸다는 말은 죽었다, 때로는 깊은 잠이 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10:8-9).”

 

이런것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선지자들이 보였던 일반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물론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던 세 제자도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습니다(17:6).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에 대해

가장 놀라운 환상을 보았던 요한은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17절 상반절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요한은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계실 때,

주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성경에 기록했던 사람입니다(13:23; 19:26; 20:2; 21:7,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이 요한에게 예수님의 어머니를

맡기고 부탁했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후에

모든 사도들이 죽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말씀과 복음을 증거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승천하신지 거의 60여년 만에

만나 뵈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하고 싶은 말씀도 많으셨을 것이고

요한도 얼마나 감개무량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영광의 주님을 뵙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했을 때,

네가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33:19). 이 말씀을 비추어보면,

육신의 상태로, 현재 우리가 가진 몸을 가지고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거룩한 기쁨 보다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는 지극히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기절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처럼 스스로 사형판결을 느끼고 죽은 자처럼 엎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갖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죄악을 갖고 살아가는 동안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이,

우리 모두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십니다.

요한에게 보이신 것을, 기록된 형태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하셨고,

모든 성도는 그 기록된 모든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성령 안에서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숨기시는 것은, 우리가 누릴 은혜와 복락을 거절하여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시려 하심이 아니고,

지금은 감당할 수 없기에 우리가 누릴 영광스러운 기쁨을

유보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합니다.

 

요한계시록의 1차 수신자인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날마다 직면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숨기신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을 거절하심이거나 그들을 상하게 하심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감당할 수 없는 장래의 기쁨을 감당할 수 있을 때에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보호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하는 모세에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33:22-23).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행하심으로써 모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차매, 요한에게는 주께서 당신의 영광의 모습을

필요한 만큼 나타내 보게 하셨습니다.

고난 당하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이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성도에게 당신의 영광을 다 나타내 보이신 것은 아닙니다.

이제 모든 성도는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성령 안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위로가 충만해질 것이고,

자신들이 걸어가는 길이 못났고 실패한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열쇠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주님을 온전하게 뵈올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언제나 선지자들과 요한이 보았던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리시지는 않으시지만,

그들이 기록한 말씀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주님을 뵈옵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크나 큰 유익을 줍니다.

그 주님을 뵈올 때,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 은혜는 참된 은혜여서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