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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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11-14 잃었으나 다 가진셈입니다

  • 느헤미야강
  • 201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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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3(목) 새벽기도회
 
잃었으나 다 가진셈입니다
룻1;11-14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이면에는 인생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는 안것입니다.
모압으로 이주했을때 그들이 생각한 것은 모압은 모든게 풍성했다는 것 한가지 이유였습니다.
나오미의 신관은 물질이었던 셈입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고난당하고 아픔을 통해 견디고 자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늘 잘되어야 한다는 세계관때문입니다.
이런 세계관은 잘 못되거나 시험은 견딜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랬던 그녀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돌아오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관, 세계관을 인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피함, 빈털터리가 되었음에도 모든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빈털터리가 되어 깨달은 것, 참된 복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 잃었으나 다 가진셈이 됩니다.
그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10년 세월동안 모든 것 잃었으나 나오미가 얻은것은 너무나 값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얻었으니 다시 다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온 이후의 삶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채워지지 않아도 문제가 될게 없습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와 함께 돌아옵니다.
처음부터 오르바와 룻이 갈라진것이 아닙니다.
출발은 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도착은 달랐습니다.
언제 오르바와 룻이 따로 길을 갔을까요?
 
나오미가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두 자부랑 가면 그마나 덜 창피할 수도 있고 덜 외로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먹여 살릴 사람도 필요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온 순간 자기 욕심을 버립니다.
며느리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죽고 사는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사람을 향한 시선도 달라진 것입니다.
 
11~13절 나오미의 이 말 뒤에 오르바는 떠납니다.
첫째, 나는 늙어 남편을 둘 수 없다.
둘째, 아들을 낳는다해도 자랄대까지 너희는 기다릴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이 나를 치셨기에 고난당한 것이니 돌아가라
이 말을 듣고 오르바와 릇기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성경은 두 사람 다 울었고 오르바는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설명합니다.
그 마음속에 들어있던 세계관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둘 다 울었습니다. 그러나 운다고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예배한다고, 함께 찬양한다고 그것이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없이도 얼마든지 예배자리 찬양과 기도 자리에 있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반면에 룻은 그를 붙쫓았더라고 기록합니다.
붙쫓았더라는 말은 딱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마음이 세상에 있었던 오르바와는 달랐습니다.
시어머니에게 그 마음이 딱 붙어있었던것입니다.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과 딱 붙어있다는 뜻입니다.
 둘 사이에 간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것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시험은 떨어져 있는 만큼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있고, 말씀에 붙어 있고,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이 붙어 있으면 시험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도 딱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는다해도
하나님께만 딱 붙어 있을때 거기에 희망이 있고 회복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둘다 울었지만 오르바는 자기 고향으로 갔고, 룻은 나오미를 쫓았습니다.
둘 다 속에 붙잡고 있는 것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제각기 살기위해 떠납니다.
엘리멜렉은 살기위해 모압으로 갔고, 오르바는 자기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죽는길이라도 나오미를 쫓아갔습니다.
 
오르바, 룻과 같은 처지였으나 한 순간 선택으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여인이 될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후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반면에 룻은 최고의 가문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르바와 룻은 똑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다윗을 누구를 통해서 나오게 할까?
인류구원을 위한 메시야를 어느 가문을 통해서 나오게 할까?
하나님께서도 고민되지 않으셨을까?
저런 여인의 삶이면 되겠다 이 땅을 둘러보시다가 발견한 보물과 같은 여인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할 때가 있습니다.
나, 내 가문, 자녀의 영적 흐름을 잡아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나의 선택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자신과 가문에 축복이 되도록
하나님께, 말씀에 붙잡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