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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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장 - 그곳이 보김이라구요?

  • 느헤미야강
  • 201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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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1 새벽기도회

그곳이 보김이라구요?
사사기2장

 
여호수아를 끝으로 정복전쟁이 끝나고 땅 분배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장을 보면 아직 미정복지역도 많았고, 계속해서 실패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삿1:19, 29, 30, 33, 34절 하나같이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공통적으로 철병거와 험한 산지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삿2:2,3)
 
쫓아내지 못한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순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처음부터 군사의 수가 많고 무기가 좋고 작전이 절묘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했느냐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이 있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불순종하여 가나안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즐겼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실패하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도 도와주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이스라엘의 반응이 4절 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사사기2:4-5)
 
백성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이곳의 이름을 보김이라고 불렀습니다.
“보김”의 난외주를 보면 “우는 자들” 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높여 울고, 제사를 드렸는데 이후의 사사기 이야기는
여전히 불순종이 시리즈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울고 회개했고 제사까지 드렸는데...
 
종종 우리고 오해하고 실수하는 것이 울었다고 하니까 금방 우리는 ‘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보김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도, 감사의 눈물도, 용서받은 감격의 눈물도, 새롭게 살아보자는 다짐의 눈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받으셨다는 기록도 용서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울고 난 다음 이스라엘이 달라진 흔적도 없습니다.
어디를 보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습관적으로 울어버린 것입니다.
불순종했다니까? 어려움 생겼으니, 잘못했다 하니까
어린아이가 잘못 저질러 놓고 부모가 회초리를 드니 무조건 우는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싸움이란 찬송부르다 눈물 한번 흘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봉사 한번했다고 내 영성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게 아닙니다.
잘못했구나 후회했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도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을 철저히 거부해야 합니다.
가나안 부족을 종으로 부려먹으며 편안히 살겠다는 의지를 버려야 합니다.
몇 만명이 모여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회개합시다.
 
소리 한번 치고 끝난다면 그곳이 바로 보김입니다.
사기 치고 부정축재하고 감사헌금 몇 푼으로 양심을 달랬다면 그곳이 보김입니다.
맨날 감동은 받는데 내 삶과 신앙과 성품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곳이 보김입니다.
이 예배가 보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눈물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보김의 눈물은 이런 책임이나 결단이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울어도 안되고 제사를 드려도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답이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삿2;1)
 
하나님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왔다는 것은 “길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길갈의 정신, 길갈의 언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길갈 언약은 여호수아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 점령직전에 할례를 행하게 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위해 자를 것 잘라내고 자신을 죽이는 아픔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순종과 거룩이 이 싸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신뢰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2. 길갈이란 “굴러갔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수치, 애굽의 욕망을 굴려버린 곳입니다. 애굽을 떠났을 뿐, 마음속에는 늘 애굽의 노예 정신이 살아 있었기에 자라내는 결단을 한 곳이 길갈입니다. 노예근성을 버리기 전까지는 여전히 노예일 뿐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노예가 되어 살던 그 부끄러움을 자르고 굴려버린 곳이 길갈입니다.
 
3. 유월절을 회복한 장소입니다:
애굽의 바로와 하나님께서 싸우셨고, 그 싸움의 절정이 유월절이었듯이 이제 바로와 싸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가나안과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온 장소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내가 임마누엘 하나님되어 동행 하시겠다, 가나안의 주인이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곳은 보김입니까? 아니면 길갈입니까?
세상을 놓지 못해 쩔쩔매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자르고 사십니까?
맨날 울고 있는 너의 눈물이 정말 가치있는 눈물이냐?
맨날 가슴 아파하는 그 진통이 의미있는 고통이냐? 하는 것입니다.
돈 잃어 울고, 몸 아파 울고, 가슴이 쓰려 울어 보았지만 정말 하나님을 더 섬기지 못해 울어본적 있느냐?
하나님 섬기고 사랑하는 내 모습이 초라해서 가슴을 쳐 보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오늘 나의 눈물은 보김의 눈물일 뿐입니다.
내 표피를 부싯돌로 자르는 고통 때문에 울어야지 세상 사람들 누리는 것 누리지 못해 억울해서 울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 보김의 눈물은 부끄러운 눈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 사람의 변화없이 형식과 위선, 모양만 그럴듯한 세상이라는 보김을 벗어나 길갈로 가라 하십니다.
순종과 거룩의 자리,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리,
예수 믿었지만 여전히 세상가치에 마음 두는 것을 잘라내고 살아가는 길갈로 가라 하십니다.
울면 다 되는 줄 알았던 백성들에게 참된 회복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