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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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9장_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대한 찬양

  • 느헤미야강
  • 2019-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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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1() 새벽기도회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대한 찬양 <19장>

 

계시록 17, 18장에서는 음녀 바벨론의 처참한 최후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계시록 19장에서는 정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등장합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무너짐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할렐루야 찬양이 울려 퍼지고 있음을

계시록 17,18장과 19장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11절 이하를 보면 이 땅에서의 사단의 추종자들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린양 예수님께서 흰 말을 타고 등장하셔서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19)을 다 죽이고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합니다(21).

 

이렇게 바벨론이 멸망할 때 허다한 무리의 사람들(1,6),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4)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대조는 고난 받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힘과 위로를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잘 보면 요한이 고난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얼마나 조직적으로 섬세하게 기록을 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묘사할 때 삼위 하나님의 숫자인 3

안식의 숫자인 완전수 7에 맞추어서 기록을 합니다.

4;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때에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5;12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7:12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오늘 본문 1절도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이렇게 삼중적인 용어를 써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장에서 또 세 번에 걸쳐 할렐루야 찬양이 등장합니다.

할렐루야 단어는 네 번 등장하나 세 부류의 사람들

1~3절은 허다한 무리가 부르는 할렐루야 찬양이고

4,5절은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부르는 할렐루야 찬양이며

6절 이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할렐루야로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록의 구조와 서술을 통해서도 고난받는 성도들을 향해서

삼위 하나님, 안식의 완전수로 위로하겨 격려하십니다.

 

이어서 6절 이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준비된 신부이야기입니다.

주목할 것은 어린양이 아내된 성도들에게 깨끗한 세마포 옷을 허락하셨다.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된 성도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깨끗한 세마포 옷, 옳은 행실입니다.

이 말은 예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구원얻는 백성되었지만

동시에 어린양 예수님게서 옳은 행실을 주셨다는 의미와 더불어

옳은 행실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신부의 준비는 구원얻음과 마땅히 행해야 할 옳은 행실입니다.

구원얻음이 성도의, 신부의 전부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신랑을 위한 신부의 준비, 행실의 핵심은 거룩함입니다.

 

이어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 자기밖에 아는 이 없는 이름,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름하는 예수님께서 흰 막을 타시고

하늘의 군대들과 천하 만국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두 짐승과

싸워 이기시고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마무리 합니다.

은혜인 것은 예수님은 창조때부터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하늘에서도 여전히 일하시고 싸우고 계시는 분이심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위로요 다함없는 힘임을 고백합니다.

 

저는 오늘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말씀이

3절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대한 찬양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34;9-10절 에돔을 심판할 때 표현과 유사합니다.

34;9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10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세상의 악은 그렇게 처참하게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통치와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바른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고전 13;6절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의 사랑안에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불의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들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악에 대한 심판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불의에 대한 심판이

우리 각자의 인생 속에서도 매일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이지만 역시 우리 안에 남아있는 악과 불의의 잔재들을

떨어버리는 작업이 지금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 악을 계속 두고 보실 수 없으신 것처럼

택하신 당신의 자녀, 어린양이 신부인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불의와 악을 하나님은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나도 알지 못하는’ ‘불의와 악

매일 매일 심판하셔서 다듬으시고 죽여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때때로 고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할렐루야 찬양하게 하십니다.

반면에 우리 안에 있는 불의함을 심판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한 백성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외부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더불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불의함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속에 있는 불의함과 악한 것들을 잘라내시느라

때때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삶 속에 일어납니다.

그 때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불의와 죄와 악의 잔재를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여전히 구원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더러운 옛 사람의 잔재를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심판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던져지는 심판은 죄인들에게 쏟아지는 심판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기 위한 거룩한 심판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훈련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 고난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삶에 만사형통,

일사천리의 복만 쏟아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의 거룩을 완성시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때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었던

천상의 할렐루야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나라 백성으로의 완성이지

이 땅에서의 소원 성취, 문제 해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도

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을 읽어 내며

기쁨의 찬송을 부르실 수 있는 참 성도의 삶을 배우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의 찬송처럼 그분은 우리를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다면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최상의 상황일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