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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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5장_두 종류의 신앙;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 느헤미야강
  • 2019-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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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6() 새벽기도회

 

두 종류의 신앙: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5;11-14>

 

히브리서 5장은 11절 이하는 예수님은 아론계열이 아니라

왕이었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분임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히브리서 수신자들을 향하여 질책과 권면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깊은 복음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수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들의 영적 미성숙의 문제를 지적하고 경고합니다.

 

히브리서 5장에는 두 종류의 신앙을 말하는데

하나는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고,

또 하나는 딱딱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와 같은 신앙입니다.

신앙에도 단계가 있어서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자라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어린 상태에 머무는 것은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를 반복하고,

늘 결심해도 그 결심대로 살지 못하고

매일 죄에 굴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속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신앙생활의 근본을 경험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원인들은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단계가 있지만 어린아이 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를 출산하고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라고 성장해야 하나

어느시점에서 멈추어선다면 부모에게는 커다란 낙심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어려서 젖을 먹는 것 같은

유아시기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아기가 1, 2, 5, 10, 심지어는

20~30년 계속된다면, 그렇게 성장을 멈춘 채 우리의 신앙이

병적인 유아기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유아상태에 있는 본인의 삶 또한

불행하고 비참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계속해서 육에 속한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주님이 어떠한 은혜를 주신다 하더라도 그 은혜를 곧 흘려버리고

다시 고갈된 상태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죄에 계속해서 굴복하며, 어떠한 신령한 세계도 맛보지 못한 채,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의 삶,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게 되는 불경건의 삶을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병적 유아상태의 증상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11,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나

둘째,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셋째, 13,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즉 둔하고, 성장이 없는 것,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둔하다는 말은 게으르다는 말입니다.

성숙과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고, 천상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순례의 길을 바쁜 걸음을 하면서 부지런히 걸어가야 하는데,

그만 영적인 잠에 빠져서 전진하지 못하고, 도리어 후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상황이 심각하게 영적으로 위태한 상황인데,

마땅히 그것을 깨닫고 시급히 조치를 취하고 거기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모든 주의와 관심과 노력과 열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안일함과 게으름에 빠져서 영적으로 부주의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유아상태에 오래도록 머무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혼의 곤고한 상태에서 의문점은 많은데, 물음표는 수없이 많은데,

마침표는 한 번도 못 찍어본 사람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곤고할까? 영적으로 왜 이렇게 핍절할까?”

오늘은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내일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세상일에 바쁘게 살아갑니다.

수없이 물음표가 떠오르지만, 비누 방을 터지듯이 다 터져서 사라집니다.

뭔가 문제의식은 있는데, 정말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결말이

어떻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인지, 그러므로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일에는 관심이 많고 부지런을 내는데,

정말 중요한 영혼과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게으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아주 분명한 증거입니다.

 

 

둘째로, 성장이 없고, 유아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입니다(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복음을 믿은 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성장을 지속해왔다면 누구에게나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의 수준이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전혀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오래도록 성장을 멈춘 채 신앙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제가 몇 년 전에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가봤는데,

그 광경이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넓었던 운동장이 작아보이고,

한없이 크던 건물들이 작게 보였습니다. 길고 높게 학교를 향해

올라가는 오르막길이 이제는 나지막한 언덕처럼 보였습니다.

건물이나 환경이 변할 리는 없습니다. 내가 성장한 것입니다.

자신이 성장하고 더 넓은 길을 많이 보고, 더 넓은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나중에 가보니깐 그 초등학교가 옛날의 동화의 나라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성장에서 오는 옛날의 나와의 격차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나를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성숙하지 못한 행실을 하면서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지,

옛날을 회상하면 막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럽고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일기를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럽듯이

그렇게 격차가 있어야 하고,

재작년과 작년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가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옛날의 나와의 격차가 있습니까?

아니면, 어제나 오늘이나, 작년이나 재작년이나 자신이 늘 한결같습니까?

더 큰 문제는 무엇인가하면, 병적인 유아기가 오래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변화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조차 갖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심히 의문이 되는데,

설사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한 번도 마음을 바쳐서 주님을 사랑해본적도 없고,

주님을 위해 살아본 적도 없는, 그래서 일생동안을 처음 은혜 받았던 때를

떠올리면서 그때가 좋았지...” 하면서 인생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더욱이 교회가 그러한 병적 유아기에 머무르는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차게 될 때,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커다란 부끄러운 일이며,

그런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데 있어서 별로 쓸모가 없고

도리어 훼방하고 방해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기 전에 항상 교회를 먼저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자들을 먼저 심판해서 청소해서

교회를 정결케 하신 후에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를 향해서 거는 기대가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바보 같은 것이 교회의 숫자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의 마음에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심겨져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그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서 오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서말의 가루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딱 한 줌도 좋으니, 누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누룩이 참된 누룩을 계속 만들면서 확장되어가는

그런 교회의 성장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지,

거듭나지 않거나, 혹은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변화되지 않은 채

그렇게 1020년씩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희망적인 증거가 아니라,

아주 절망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혹시 그런 교회는 아닌지,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셋째,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4)

말씀과 복음의 진리를 듣는데 게으른 사람은 영적 성장이 없게 되고,

그런 사람은 복음의 진리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거의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희박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모릅니다.

 

반면에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에 대한 지각이 있어 그 맛을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19:10에서 말하기를

이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보면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그래서 이 성경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영혼의 참된 기쁨이 넘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위로를 얻고,

주님과의 더 깊은 사귐 속에서 힘을 얻고, 능력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이것이 말씀이 주는 능력과 은혜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내 영혼이 병적인 유아기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진실 되게 직시해야 합니다.

변화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변화는 오직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써만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나 자신을 죽을 각오로 훈련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의 방도에 온전히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루에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무시로 기도하고,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를 구하면서,

자기를 참되게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병적인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계시고,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고쳐 변화시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