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히6장_구원의 지표는 은혜가 아니라 열매이다

  • 느헤미야강
  • 2019-07-17
  • 442 회
  • 0 건

20190717()새벽기도회

 

구원의 지표는 은혜가 아니라 열매이다 <6;1-8>

 

오늘 읽은 본문은 히브리서뿐만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손꼽히는

난해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4-6절 말씀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두려운 말씀임과 동시에 혼란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어도 이후에 타락하게 되면,

참된 신자라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이 잘못 살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습니까?

한 번 얻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전체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면 여기서 타락하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문을 주의를 기울여서 읽고, 해석할 때 성경전체의 문맥과

히브리서 전체 문맥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수신자들의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면서

풀어가야 이런 난해한 부분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본문은 6가지를 말하는데,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들,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입니다. 6가지는 바로 구약의 가르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교리들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 교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대교의 도의 초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6절은 이렇게 성숙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그리스도의 초보,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러 있을 때 발생하는 극단적인 결과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4절은 원어로 보면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힘입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데로 나아가지 않을 때는 타락하여서

다시 회개케 함을 얻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회개함을 받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히브리서 저자는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 필수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6절을 보면 다시 회개케 함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자인지에 대해서

5개의 분사로 표현되고 있는데,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입니다.

 

이러한 4가지 체험을 했음에도 타락하는 자는 다시 회개케 함을 받을 수 없는데,

여기서 이 타락한다는 말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배교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타락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유대교를 믿거나, 예수님 믿으면 죽인다는 핍박이 있어서

공개적으로 배교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타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타락의 중요한 특징들을 우리도 행한다면, 우리가 설사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타락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타락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도 고의적이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바로 타락한 것입니다.

 

영적 체험을 하고 신앙을 가졌다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해서

양심에 화인 맞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완전히 죄에 사로잡힌바 되어서 이성 없는 짐승처럼

육체의 더러운 정욕을 따라 살되 공개적으로, 수시로 죄를 범하는,

그야말로 탐욕에 연단된 자가 되는 것도 이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고,

어떤 영적 체험을 한 뒤에 신앙을 가졌다가 어떤 계기로 신앙을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훼방하는 삶을 사는 것도

바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만,

연약함과 불신앙 가운데 교회를 잠시 안 나오는 것은 타락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그리고 고의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를 짓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타락하는 것인데,

이렇게 타락하면 그 사람에게는 다시 회개할 기회가 없는 것이고,

회개할 마음조차 그 마음에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남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영적 유아상태에 계속해서 거하면서

영적으로 게으르고 안일한 삶을 살면, 처음에는 은밀하게 죄를 범하지만,

갈수록 마음이 강퍅해져서 나중에는 그렇게 아예 대놓고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4가지의 경험을 하고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 4가지 경험을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4가지 체험을 한 자들의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7-8절의 두 밭의 비유와

9절의 히브리서의 저자의 권면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본문의 밭의 비유는 모든 출발점이 같고

땅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것도 같고,

밭을 가꾸는 농부의 손길을 받는 것도 똑같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거기서 결과적으로 산출되는 작물이 무엇이냐 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모든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라는 것입니다.

4가지 체험을 하고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은 이 4가지 체험이 중생여부를

증명해주는 신자의 표지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초점은 이 4가지 체험을 한 우리 모두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우리 모두의 책임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은, 일차적으로

이 말씀이 우리 모두를 향한 진지한 경고의 말씀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이런 타락이라는

비참한 상황에까지 떨어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정말 자신의 영혼의 위험한 상황을 알아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앞에서 타락하는 것에 대하여 통렬하게 경고를 했지만,

그러나 히브리서 수신자 로마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큰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구원을 확신한다며 격려합니다.

그들에게서 구원 받은 증거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즉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행위가 그들에게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단순히 불우이웃돕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희생하여 섬긴 것입니다.

이것이 10:32-34절에 잘 나타납니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들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힘써 섬겼을 것입니다.

교회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로마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여타 어려운 교회들을 재정적으로 힘써 섬겨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도 주님의 이름을 위해 이 일에 힘써 동참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 믿음과 소망으로

한차례 고난과 핍박을 견뎌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병적인 유아기에 오래도록 머물러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그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행실은

바로 그들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리고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사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너희가 그런 일을 하였고, 지금도 미약하지만 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가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의 구원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너희가 지금 이 상태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참된 거듭난 신자로서 구원의 소망이 있는 자들인데,

계속하여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지 아니하고 병적 유아기에 머물러 있어서

잘못하면 흘러 떠내려갈 위험에까지 처해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수차례 통렬하게 경고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는 결코 그들이 결국

버림을 받게 될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통렬하게 경고한 것은 너희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서,

병적인 유아기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 받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구원의 순례의 길을 완주하도록 돕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얻는 지표가 은혜체험이 아니라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즉 열매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체험에 걸맞는 믿음의 열매를 위해

어린아이,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