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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새벽기도회 (5) -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

  • 느헤미야강
  • 201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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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1(토) 행복축제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 ⑤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
사도행전 9:31
 
매년 교회의 표어를 어떻게 정하는 모든 목회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공동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첫 머리에서 교회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이 모인 곳, 그게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건물이 없고 예배당이 없어서 들판에서 예배를 드리고 거리에서 드린다 하더라도
그 모임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 모임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셨습니다.
그 공동체 역시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아둘람 동굴로 쫓겨갔을 때, 그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환란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리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거기서 또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그것 역시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든, 평안하고 든든한 교회가 됐으면 좋겠는데 과연 그러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나오는 일차적인 이유는, 거기서 평안을 얻고 위로와 쉼을 얻기 위해서일텐데
오히려 교회에 나와서 상처받고 실망해서 신앙을 까먹습니다.
그래서 옆의 교회는 괜찮을까 해서 가보면 거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목회하셨던 교회를 보겠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온갖 기적을 일으키시고, 자연과 죽음까지도 이기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교인들은 많지도 않고 12명입니다.
모두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선택하신 교인들입니다.
목사님이 더 없이 훌륭하셨고, 교인도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그 교회는 처음부터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갔어야 했을 것 같은데, 결국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사님만 훌륭했지 구성원 자체가 워낙 취약한 모임이었습니다.
대부분 어부들입니다. 배움은 부족했고, 좀 낫다하는 사람은 왕따 세리이거나,
혁명을 꿈꾸는 급진성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격은 전부 다 별난 사람들입니다.
다혈질에, 양보할 줄 모르고, 목소리는 크고, 욕심많고, 도둑까지 있었습니다.
인격이랄 게 없는 자기만 아는 위인들이었습니다.
그 삼년 동안 제자들이 한 일이 예수님앞에서나 사람들앞에서야 점잔빼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끝없이 다퉜습니다.
자기들 중에 누가 제일 크냐 그겁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 자리를 미리 확신히 해두어야 겠다고 했고,
어떤 제자들은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높은 자리를 자기 것으로 못박아두려고 했습니다.
 
그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됐습니까?
예수님이 잡혀 돌아가시기 바로 전 날까지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잡혀갔습니다.
교인 중 한 사람이 돈을 받아먹고 팔아 넘긴 겁니다.
그 교회 어떻게 됐습니까? 하루 아침에 완전히 공중분해됐습니다.
믿음좋다고 서로 자랑하고 고백했던 교인들, 다 도망갔습니다.
설마 예수님이 세우셨던 교회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습니다.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 교회를 보겠습니다.
목사가 용맹했습니다. 무술로는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시도 잘 쓰고 음악과 연주도 잘 하고 설교도 잘 했습니다.
전쟁을 할 때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요즘말로 리더십, 설교, 찬양, 글에 싸움도 잘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모두 다 사회에서는 쫓겨났거나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극빈자에, 빚쟁이에, 노예에, 조폭에, 무식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 400명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착하고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도 400명 정도가 모여살자면
그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거의 난민수준의 사람들 400명이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막힌 일이 많이 생기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그 오합지졸들을 훈련시켜서 사람답게 만듭니다.
 그 희생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었겠어요?
그랬는데 단 한 번 자기들에게 어려움이 닥쳐오니까, 하루아침에 다윗을 죽이자고 작당을 합니다.
백번 잘 해 주다가 단 한 번 못해줬을 때 언제든지 배신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아둘람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구조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죄인들의 모임이요, 약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가 정말 왜 이래?"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원래 그런 곳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맨 사기꾼과 창녀와 세리와 같은 낙오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주님도 당신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생각이 틀리고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모입니다.
구조적으로 평안할 수 없게 되어있고, 생태적으로 상처받게 되어 있습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불완전한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벌써 10여년 된 내용입니다. 영국 주간지인 브리티시 위클리 신문에
어떤 사람이 글을 투고했는데 그 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나는 30년 이상 교회를 거의 빠짐없이 다닌 사람으로
3000번 이상의 설교를 들었고 사람도 1000명 이상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난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개의 설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교회서 만난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아직까지 맘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제부터 목회자들은 설교말고,
다른 일에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또한 교인들은 차라리 교회생활 말고 자선단체에서 활동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기사가 나가니까 여기저기에서 막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 맞아! 난 말이야, 성전 문 밖에 나가면서 설교가 뭔지 잊어버려.”
"그래, 설교 들어봤자도움이안돼 또교인들치고이상하지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더라"
그런 식의 온갖 얘기가 시중에 떠돌면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주 뒤에 또 한 사람이 그 신문 똑같은 란에 글을 투고했는데,
그것으로서 그 논쟁은 끝이 났다고 합니다. 이랬답니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 된 사람으로, 그 동안 32,850번의 식사를 했다.
대부분 아내가 요리해서 차려놓은 식탁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많은 음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내가 먹은 음식의 식단을 정확하게 한 가지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과
또한 그 음식 재료를 샀던 가게의 주인들도 거의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나에게 그 음식물과 그 가게주인들이 없었다면,
나는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가 불완전한 곳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울러 교회가 여러분을 지금까지 지켜왔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에 세워진 어떤 교회라도 주님의 피값으로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하나도 없고
우리 중 누구라도 주님의 피값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과 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여전히 죄인되었을때에,
내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을때에 이미 사랑하시기로 작정한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통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핏보면 교회는 불완전해 보입니다. 또 실제로도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그런 곳에 무슨 평안함이 있고 날마다 더 든든히 서 갈 수 있겠냐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엔 분명히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수가 많아 졌다고 했습니다. 바로 초대교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셔서 세우게 하셨던 지상의 첫번째 교회,
그 초대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이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그렇게 평안한 교회였고, 든든히 서 가는 교회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초대교회 사람들은 모여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가슴이 뜨거워져서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말씀앞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그 정도 능력받았으면 더 이상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매일 구시에 기도하러 성전엘 갑니다.
그 길에서 앉은뱅이를 예수 예수 이름으로 걷게 합니다.
제자들이 유명하게 되자 예수님을 못 박았던 대제사장들이 그들을 붙잡아다가 위협을 합니다.
그러나 더욱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감사하니까 자기 재산을 다 내어 놓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사람이 매일매일 늘어났고,
모두들 집에 있든 성전에 있든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유대교 지도자들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스데반이 신성모독죄로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날 예루살렘엔 큰 핍박이 일어나서 사도들만 빼놓고는 만명 이상 됐던 많은 교인들이
유다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다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이란 청년이 나타나서 계속 핍박합니다.
군대를 동원하고 조직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자기가 핍박하는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이방인의 전도자가 됩니다.
한편, 핍박 때문에 흩어졌던 모든 성도들은 가는 곳곳마다 다시 예수를 전하게 되고,
그래서 이스라엘 전역이 복음의 물결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땅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어느 교회든 모두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던 것입니다.
 
이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서 제가 우리교회를 생각해 봤습니다.
모두가 모여서 뜨겁게 기도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뛰쳐나가서 말씀을 전해보질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적도 없습니다.
 위협을 당한 적도 없었습니다.
사울같은 인간한테 잡힐까봐 겁먹은 적도 없습니다.
스데반같은 순교자가 나온 적은 더더군다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담이 될 만큼 큰 재산을 내 논 적도 없습니다.
더더욱 예수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든 땅을 떠나야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항상 '내' 문제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는 게 우리들 모습이었습니다.
 뭐 하나 희생다운 희생을 치룬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교회가 어떻게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그때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주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되기 위한 조건이 뒤에 나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많아지니라"(31절)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당할 모든 환란과 핍박과 희생은 이미 주님이 치뤄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부탁하고 요구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주를 경외하라는 것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교회가 든든히 서 갈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교회가 정말 소중히 여겨지십니까?
그래서 교회의 부흥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습니까?
정말 평안해서 든든히 서 가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예배하는 자리, 기도하는 자리, 봉사와 섬김의 자리, 사람을 만나는 자리,
나를 보내신 일터나 배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저는 오늘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라는 말씀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이번 특별새벽기도회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은 위로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제 마음속에 최고의 위로와 격려는 성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때 장안에서 의리의 사나이로 알려진 장세동씨를 아실 겁니다.
전두환씨의 경호실장으로 일했고, 퇴임 후에도 끝까지
전두환씨 옆에서 온갖 잡일과 악역을 도맡았던 심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세동씨가 어떻게 그렇게 전두환씨에게 죽도록 충성하게 됐는지 그 계기가 있었답니다.
장세동씨는 육사를 나오긴 했지만, 전남 고흥 출신입니다.
아시다시피 육사에서 출세하려면 경상도출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장세동씨는 자기 주변에 선배고 친구고 친하게 지내거나 끌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장세동씨가 중대장일 때 월남을 가게 됐는데, 하루는 대대장이 부르더랍니다.
바로 전두환 씨였는데 그때 그 전두환씨가 그렇게 말하더랍니다.
"세동아! 내가 니 어려움을 안다. 이제부터 내가 너 끌어줄께.
니 옆에 항상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힘내거래이!"
그 날 장세동씨는 자기 막사로 들어와서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던 그 동안의 군대생활이 한순간에 다 잊혀지더랍니다.
그러면서 각오했다는 거예요.
"그래!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죽겠다!" 그렇게 마음먹었답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받고싶은 게 위로의 말입니다.
그 위로의 말 한 마디에 온갖 시름을 접을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람의 위로도 이렇게 좋은데, 그것보다 더 좋은 위로가 우리에겐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위로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핍박을 받고 환란을 겪는 고통 중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령의 위로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8:26절의 말씀은 언제나 힘이 되고 큰 위로가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가신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돕는 위로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이 성령님입니다.
그 분은 우리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기도를 시키시는 분입니다.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 분입니다.
 
갈릴리와 유대지방에만 계셨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위로 하시는 분으로 와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는것은,
그 분의 임재를 깊이 느끼고 내 전 생애를 그분께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 속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절제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식한 베드로가 갑자기 그렇게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었던 힘은 뭘까요?
무서워서 옴싹달싹 못하던 제자들이 그렇게 담대하게 예수를 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였을까요?
스데반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게, 또한 '저들에게 이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거룩하게 죽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가슴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 열매들이 일시에 대폭발을 했던 것입니다.
빅 뱅이 있은 다음엔 모든 게 변합니다. 예수 만난 사건은 빅 뱅 사건입니다.
그러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그런 성령의 폭발이 있기를 바랍니다.
120문도가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성령의 열매가 일시에 터져나온 것입니다.
 
그들 속에 전에 없던 사랑이 생겨났습니다.
기쁨과 평안이 생겨났습니다.
참는 마음과 바다처럼 넓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마음은 양처럼 한없이 온순해졌습니다.
또한 주를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습니다.
또 언제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무엇보다 성령의 임재와 위로로 사역을 감당하십시다.
그러면 어느순간에, 우리 모두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있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교회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 있어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