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20230905(화), D6묵상, 왕상17;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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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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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남왕국 아사왕이 통치할때 북이스라엘은 아합이 통치하고 있을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마르지 않는 샘 대신 가뭄 한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

먼저, 시냇가에 보내셔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시냇물이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시돈에 있는 한 과부의 집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시돈땅은 바알 우상의 본거지로 영적 죽음의 땅입니다. 하나님게서는 그곳 과부의 마지막 음식을 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을 알기전에는 너무나 가혹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과부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마지막 음식을 내어주는 순종은 자기의 남은 생명을 내어주는 시간이었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음식을 먹게 하신것은 그 가정의 남은 생명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에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는 순종을 합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떡과 포도주는 나눠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 잔은 내 피이고 떡은 나의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먹으라는 뜻이었습니다. 받아 먹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가져 가시고 우리의 죽음은 생명이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 마지막 생명을 지켜줄 음식을 내어주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과 우리의 죽음이 교환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르밧 과부와 아들, 엘리야는 이 사건 이후 가문이 끝날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2.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끝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과부 아들이 급성질환으로 죽게 됩니다. 이 때부터 새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우리 신앙의 많은 경우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죽을뻔했는데 살았어’. ‘내 필요를 다 채워주셨어’. 신앙은 거기에서 끝나면 안되기에 다음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줍니다.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믿음이 실체가 드러납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남은 음식을 드림으로 하나님이 채우시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거나 믿은것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안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눕혀 놓고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립니다. 마치 자기 생명과 아이의 죽음이 맞 교환되는 것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목숨을 건 희생은 어떻게 가능할까요이스라엘 12지파, 요단강 건너 가나안땅 들어갈때 제일 앞에 법궤가 가고 그 뒤에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가 맨 앞에 갑니다. 맨 앞자리는 적군에게서 날라오는 화살과 창을 제일 먼저 맞는 자리입니다. 이 두 지파 반은 이미 요단동편 땅을 분배 받은 지파입니다. 내 꿈이 확보되었으니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내 꿈을 꾸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내 꿈만 꾸는 사람은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꿈을 꾸는 사람은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 꿈이 먼저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꿈이 이루어졌기에 더 많은 부담과 책임을 갖습니다.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목숨 건 희생적 행동이 가능하지만,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깊은 자리로 들어가지 못합니다.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대신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이 빠져 나가는 행동으로 엎드리고 간절한 부르짖음 끝에 아이가 살았습니다. 아이가 살고 이 가정이 살았습니다. 

3.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24).

사르밧 과부는 내가 이제야 알았다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이 여인에게 참 믿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동안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 줄 몰랐다는뜻이 아닙니다. 알았지만 몰랐고 믿었지만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가진 처음 믿음은 통의 가루와 기름이 날마다 채워지는 은혜, 내 삶에 환경이 해결되었기에 생긴것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환경, 여건이 나쁘게 변하면 흔들입니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는 믿음은 두려울지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내 존재 안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칼을 들고 내리칠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삿대질하고 싶은 상황에서 결국 하나님을 신뢰했음을 인정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동안도 알았지만 그것이 격렬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어 놓을때 사실은 아브라함 자신의 죽음과 다름없는 거였습니다. 칼을 들때 이미 자신을 죽인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의 고백을 행동으로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이삭도 살았습니다. 

4.

여리고성 기생 라합이 두 정탐꾼을 도와주었습니다. 자기를 죽음에 내 놓은것입니다. 자신이 여리고 사람인데 배신함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안 죽으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죽습니다. 여리고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무너질 것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살고자 해도 죽고, 죽고자 해도 죽습니다. 배신해도 안해도 죽을 수 있습니다. 결국 두 죽음 사이에서 죽는 길과 내가 죽음으로 사는 길의 차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지만 이 삶은 계속 반복되고 결국 죽게 될 것인데,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면 홍해 건너는 일을 행햐신 분이 하나님이 맞다면 나는 누구를 따를 것인가?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줄때도 죽었고, 붉은 줄을 달아 내일때도 목숨 건 것입니다. 내 목숨 걸고 당신들 살려 주겠다. 붉은 줄로 생명의 맞 교환이 거기에서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 라합은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내 감정, 불안보다 하나님이 더 크다는 것 알고 나가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죽음같은 미움, 답답함, 혼란, 속에서 내가 죽느냐, 내 습관과 명분을 죽이고 생명의 말씀이 나를 살게 함으로 사느냐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우리도 사르밧과부처럼 내가 이제 알겠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왜 말씀이 길 인지, 마음 사막같은 내 마음, 가정안에 어떻게 진짜 제대로 된 씨앗이 나고 물이 흐르고 자라는 지 그런 은혜의 길을 걷는 삶 되어야 합니다.  

질문하기

1.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을 입증한 어떤 기회를 나에게 주셨나요?

2. 룻의 긍휼과 헌신의 이야기가 사르밧 과부, 엘리야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3.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목숨 건 희생적 행동이 가능하지만,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깊은 자리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본문을 통해서 나에게 가장 의미있게 와 닿은 것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