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20230907(목), D6묵상, 눅10;25-37

  • 최고관리자
  • 202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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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묵상 교재 가이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희생적인 기부와 사랑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에 너무 익숙하므로 그 중요한 진실을 쉽게 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청중에게 이런 종류의 사랑과 사역이 세상 문화와 반대라는 점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명의 존경받는남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강도만난자의 곁을 지나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주기 위해 멈춘 사람은 지나쳐야 할 모든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훨씬 그 이상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낯선 사람을 위해 그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상과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본문내용]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25)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지를 물으십니다(26). 그는 신명기 65절과 레위기 1918절을 인용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영생의 길이라고 대답합니다(27). 사실, 그것은 예수님이 거듭 가르치시고 성경 전체를 압축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마도 율법교사는 누군가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28)라고 답하십니다. 율법교사는 기다렸다는 듯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라고 반문합니다. 율법교사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웃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이웃에 들지 않고, 동족인 유대인들 중에도 율법을 잘 지키지 않으면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율법 교사는 이 질문으로써 자신의 의를 과시할 빌미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 속셈을 아신 예수님은 비유로 답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어떤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얼마 후에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 다음 레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는데 그도 역시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대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있을 가능성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냥 지나친 것입니다. 죽은 줄 알고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그렇게 대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 대목에서 아뿔싸, 저 사람은 이제 죽었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유대인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은 남은 목숨마져 끊어 놓고 갈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는 죽어가는 그 유대인에게 응급 조치를 하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 밤이 지나자 그 사람은 두 데나리온(이틀치 일당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던 전부였을 것입니다)을 주면서 그 사람을 맡깁니다.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자신이 치뤄 주겠다는 말과 함께. 

비유를 다 들려 주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 그러자 율법 교사는 차마 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와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의 자기 의를 무너뜨리십니다. 

[묵상]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자만을 이웃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십니다. 사랑의 대상에 있어서 사마리아인은 상대가 어떤 인종, 나라, 종교, 문화, 언어 등을 지녔든지 구애받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자신을 희생하여 충분한 도움을 끝까지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이웃 사랑이요,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대속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으로서 모든 이를 외모나 어떤 것으로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율법으로는 정죄만 있지 구원이 가능한 것이 아님을 율법을 제정한 분으로써 너무나 잘 아시기에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은혜를 베풀어 구원을 주셨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여 율법의 의를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그분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면 비로소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자들입니다. 우리는 나도 이웃을 사랑해야지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고 엄밀하게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나도 이웃을 내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정한 후에 내 방식으로만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가 주변의 이웃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자기 의를 앞세우거나 성도라는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섬기지는 않는지, 순전한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누구나 나를 어느 때나 아무 부담없이 주저하지 않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하는 최소한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자가 되어 있는지도 살필 일입니다.

 

[질문하라]

1. 이번 주에 낯선 사람, 소외된 사람, 상처받은 사람에게 세상 문화와는 다른 어떤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2. 오늘 기억할 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3. 오늘 실천할 한 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반응하라] 말씀과 질문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 것인가?

 

팩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지위에 상관없이 주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최고관리자 23-09-07
      운명에는 목격자가 있고, 목격자의 운명이 있습니다. 혹 상처 입고 쓰러져 위기를 맞고 있는 누군가를 목격하신 적 없으신가요? 그 때 어떻게 하셨나요?

      포대기에 쌓인 아기가 길가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아기의 목숨이 위태롭기만 한데 한 사람, 두 사람…, 마침내 열일곱 번 째 사람이 그 아기를 지나칩니다.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는 사이 아기는 목숨 줄을 놓아버렸습니다. 얼마 전 중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어찌 중국만의 문제겠습니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내가 이웃의 위기에 무디고 무딘 피폐한 영혼이고, 그럼으로써 나의 위기에도 아무에게도 손 내밀 수 없는 고립된 영혼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이웃 사랑에 관한 무수히 많은 성경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그냥 지나쳐버린 앞의 두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바로 나 일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우리 역시 누군가에 의해 넘어지고 다 죽어갈 것 같은 때를 맞이하곤 합니다. 그럴때 누군가가 나의 이웃이 되어주면 좋겠는데 싶을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지나쳐간 두 사람이나 강도만난 만난 사람이나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의 자화상은 아닐까를 생각합니다.
      나 역시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