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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메시지: 우주적인 왕국, 사9;7(공의와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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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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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슈파트(정의)와 쩨다카(공의) 중심으로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궁국적으로 다윗 언약(삼하 7:13)을 성취하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윗 언약어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상 선하게 평가되는 왕은 솔로몬어나 허스기야, 요시야 등 몇 사람이 었었지만, 다윗 언약을 완벽하게 성취한 왕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밸론 포로 이후로 왕의 계열이 끊기고 말았으며,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왕은 다윗의 가문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하 7:13에서 다윗에게 주어졌던 언약어 좌절된 것은 아닙니다. 그 언약의 핵심은 그것의 영적인 면에 있으며, 그 성취자는 영적 통치자로 오실 분 다윗이 ’내 주‘ 라고 고백하는 그의 후손(시 110:1)이 되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으므로(룸 1:3) 다윗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의 주가 되시는 분으로서(마 22:42-45) 다윗 언약을 완벽하게 성취하실 것입니다. 교회 시대에 그는 교회를 통해 그것을 부분적으로 성취하고 계시며, 재림 이후에는 그 모든 언약을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완전하게 성취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와 그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만드실 평강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적 의미에서 유대의 왕이 되지 못하였지만, 영적 의미에서 진정한 유대의 왕이셨습니다.동방에서 온 박사들은‘유대인의 왕’ 이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고 (마 2:2) 그때 유대의 율법 학자들은 그곳이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말해 줌으로써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습니다(마 2:5-6). 또한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심으로써 그 사실을 시인하셨습니다(마 27:11). 또한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에 패를 달면서‘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였습니다(요 19:1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정치적인 의미의 왕이 아닙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의 백성들, 곧 영적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며 그이 통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당시 유다의 지도자들, 재판관들이 헌신짝처럼 버렸던 지도자의 덕목인 ‘정의’와 ‘공의’를 메시야가 소중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정의(미슈파트), 공의(쩨다카)는 사1:21.23; 5:7에서 잘 설명해줍니다.

본문 이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대하신 좋은 열매가 정의와 공의인 반면 그들이 맺은 들포도가 포학과 부르짖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대비지켜 보여줍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언어유희를 통해 이스라에 ㄹ자손들의 죄악을 비웃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여호와께서 ‘미슈파트’를 바라셨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미스파흐’(포학)를 맺었고, 쩨다카를 바라셨지만 ‘차아카‘(부르짖음)를 맺었다고 말합니다. 발음은 흡사하지만 의미가 정반대인 단어를 구사하여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어긴 악행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미슈파트‘는 법적 기준에 입각한 정의를 말합니다. 이는 재판관이 뇌물을 받지 않고 오로지 공의에 입각하여 판결을 내리며 사람을 이모로 취하지 않고 내린 객관적 판단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미슈파트‘가 아니라 ’미스파흐‘(부르짖음, 불법, 피흘림, 압제)를 맺었습니다. 즉, 미스파흐는 권력을 가지고 었는 기득권자들어 정작 그들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사회적 약자들을 상대로 착취와 압제를 일삼고 심지어 상해를 가하여 죽음의 수렁으로까지 몰아 넣었음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바라셨던 쩨다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사회속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지배할 때 억울한 자의 눈물과 신음소리가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쩨다카는 부당하게 암제를 당하는 자들이 그 비판속에서 부르짖는 억울한 외침을 가리킵니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압제를 견디지 못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던 히브리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다(출3:9). 이렇듯 이사야 선지자는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포학과 부르짖음의 열매를 만들어내는 기막힌 현실앞에서 개탄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지적을 통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 신앙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참 신앙의 면모를 예배와 기도, 헌금, 교회봉사 등과 관련짓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들 역시 하나님을 경외함이 수반되면 나름의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참 신앙에 대한 완전한 척도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것에 더하여 또 한가지 것을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으로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쩨다타)를 구현하고 주번에 어려운 이웃, 사회적 약자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온갖 제사를 다 드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제사들, 절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혐오스럽고 가증한 것으로 규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종교적 행위를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제물을 바친다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불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들, 약한 자둘, 고통받는 자들을 대하여 무자비하고 냉혹한 짓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시며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그분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사를 드리길 원하며 참 신앙인으로 여겨지길 바란다면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며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본받아 긍휼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기초로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경건, 참 신앙을 소유한 자로 비쳐지고 있습니까? 혹 예배만 드리고 불의를 자행하는 거짓된 삶, 주번의 고통받는 이웃과 연약한 자들의 사정을 외면하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자, 참된 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하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과 그 아들과 자손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신 명령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가정에서 세대간 신앙이 전수되게 하는 핵심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룻에게 행한 공의로 이어지고 다윗를 통해 솔로몬이 행하도록 한 기도에서도 드러난 내용입니다.

물론 사람, 인간 왕은 실패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과정속에서도 하나님을 가정을 통해 그 일을 이루어가시기를 기대하셨고 마침내 최종적으로 성취하시고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졌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나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강한 힘으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쩨다카)입니다. 즉 유대의 지도자들이나 재판관들과 달리 메시아는 정의와 공의로 결코 흔들리지 아니할 견고한 왕국을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열심은 ‘질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질투는 자기 백성이 자기 외에 다른 그 어떤 우상도 사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그의 백성에 대한 독점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즉 본문에서 이 단어는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