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20240412(금), 완전한 회복, 사11;1-9

  • 최고관리자
  •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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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가이드 

우리는 폭력과 부정의가 뒤섞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쟁, 전쟁, 테러 위협, 그리고 현실의 테러 공격, 살인, 인종 차별과 같은 악의 행위들이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완전히 탈출할 수 없는 타락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직접 텔레비전에서 보는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이런 현상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이혼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고, 어린이들이 버려지거나 방치되며, 학대를 당하고 위탁 보호를 받는 사례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며,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평화, 정의, 의로움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이상적인 통치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지혜와 그분의 결정을 집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판단은 단순한 물리적 증거나 소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완전한 의의 기록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리더십과 완벽한 판단은 그분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완벽하게 평화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러한 평화로운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예는 하나님께서 죄의 저주 없는 피조물을 어떻게 의도하셨는지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포식자도 먹잇감도 없고 오직 평화와 자연의 완벽한 조화가 있을 뿐입니다. 완벽하게 다스려진 이 땅에서는 누구도 해를 입지 않으므로 약자의 안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류가 죄를 선택했을 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서 타락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을 위해 악을 멸함으로써 완전성을 회복하십니다.

 

본문이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1)라는 말은 끊어져 버린 다윗 왕가에서 새로운 왕이 나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남왕국 유다는 다윗의 후손들이 통치 했는데,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로써 다윗 왕가는 뿌리만 남고 잘려 버린 나무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그로써 다윗 왕가는 끝난 줄 알았는데, 이사야는 남겨진 그루터기에서 새 싹이 나고 가지로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왕에게는 "주님의 영"(2)이 임하실 것인데, 그 영은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입니다. 그는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3) 삼을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판단합니다"(4).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5) 삼습니다. 

그 왕이 다스리는 날이 오면 모든 갈등과 싸움과 분쟁과 살육이 그치고 모든 생명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낙원이 회복 될 것입니다(6-8).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9)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그에게로 몰려 올 것이며, 열방에 흩어져 있던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10-12). 그렇게 되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사이의 적개심이 사라지고 평화가 자리잡을 것입니다(13). 그리고 하나가 된 이스라엘은 주변의 열강들을 굴복시키고(14-15)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16).

 

짧은묵상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스도인의 삶, 가정과 교회속에서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평화와 구원의 완성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 이 예언은 온전하고도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우리는 그 영원하고도 완전한 왕이 다시 오시기를 고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땅에 허락하신 시간동안 주님의 평화가 내 안에, 나의 가정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불완전하지만 반드시 완전한 그 날이 임할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부르신 후 여전히 이땅에 살게하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