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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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수) 마가10장_하나님나라, 뒤집어 사는 나라
- 느헤미야강
- 2019-02-13
- 4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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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6절: 하나님 나라의 기준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가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가르칠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찾아와 다시금
그분을 걸어 넘길 구실을 찾기 위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2절)라고 묻습니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기에 이혼은 주로 남편이 아내를 내보내는 형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 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것은 신명기 24장 1절 즉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라는 율법을 가리킵니다.
이 율법은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했을 때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고 내보낼 수 있다”는 허용 구절만을 취합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이 율법을 오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율법을 알고 지키는 것처럼 시늉을 했지만 실은
율법을 자기들 편의대로 오용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5절)라고 답하십니다.
즉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이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므로
그 때를 대비해 최소한의 인권 보장을 위해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혼증서가 있어야 재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인용 하시어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설명하십니다(6-9절).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결혼을 영원한 결합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혼은 옵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혼이 다반사가 되어 있던 시대에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그 말씀의 뜻을 여쭙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결혼의 영구성을 강조하십니다(11-12절).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이기에 법적으로 이혼이 되었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여전히 그 결혼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혼을 하는 것은 바람을 피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의 질서가 이렇게 다릅니다.
결혼은 이토록 신성하고 영원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라면 결혼을 영구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거룩하고 사랑깊은 관계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자신의 편의와 기호와 기분에 따라 배우자를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안기려 합니다.
그것을 보고는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13절).
제자들은 아직도 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을 하찮은 존재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14절)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14절)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사회에서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더욱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그리고 겸손히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15절).
2. 17-31절: 내려 놓기
예수께서 길을 떠나실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여쭙니다.
그는 예수님께 “선하신 선생님”(17절)이라고 말을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18절)고 답하십니다.
당신은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온전한 의미에서 선하다고 할 분은 하나님 외에 없다는 뜻이고,
당신이 온전한 의미에서 선하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서 이웃과 관계되는 계명들을 열거하십니다(19절).
그러자 그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20절)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진심인 것을 아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21절).
그의 수준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수준”이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죄성으로 인해
우리가 노력하여 이룰 수 있는 수준은 아주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21절)고 하시면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21절).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율법적인 의를 무너뜨리려 하신 것입니다.
“이만큼 하면 되지 않았나?”라는 율법적 자만심이
예수님의 절대적인 요청 앞에서 무너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22절) 떠나갔습니다.
그 사람이 사라지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23절)고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적잖이 놀랍니다(24절).
당시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부는 의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감지하신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26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27절)고 대답하십니다.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인간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당시 유대교가 범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의를 쌓아서 하나님의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부자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의 부의 정도가 곧 그의 의의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생각을 뒤집어 엎으십니다.
구원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인간의 의는 그 선물에 대한 응답입니다.
부의 정도는 그 사람의 의의 정도와 상관 없습니다.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의 의를 보아줍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쌓은 부”의 분량이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라고 가르쳤는데,
예수님은 “나눈 부”의 분량이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28절)라고 답합니다.
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축복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29-30절).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29절)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포기하면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30절)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3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집이나”(29절) ‘논밭을”(30절) 버리라는 말씀은 그래도 수긍할 만한데,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를 버리라는 말씀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버리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런 어법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자녀 혹은
부모의 책임과 도리를 져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처럼 때로 사명을 위해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언제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제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앞에 있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요 하나님 나라요 복음입니다.
매일의 일상 생활 중에 행하는 수 많은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맨 앞에 두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떠나야 할 때
—특별한 부름에 응답해야 할 때 혹은 죽음의 문턱에서—
미련 없이 내려 놓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포기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31절) 역전의 현상은
하나님 나라에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이 세상 기준으로 첫째인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꼴찌가 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3. 32-52절: 무엇을 원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서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그분의 뒷모습을 보며
“제자들은 놀랐으며, 뒤따라 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32절).
뭔가 비장한 느낌이 그분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33-34절).
앞에서 두 번(8:31; 9:31) 말씀해 주셨지만,
이번에는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다가와서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37절)라고 청을 넣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분이 왕위에 올라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38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당신이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그것이 승리의 축배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할 수 있습니다”(39절)라고 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앞날을 내다 보시면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축배를 기대했지만 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의 잔을 마셨고 야고보는 순교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 오른쪽과 내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40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재림의 때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41절)고 합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그들에게도 같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 친 것에 분개했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곁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를 다시 한 번 대조시켜 가르치십니다.
“이방 사람들”(42절)은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서로 높아지기를 경쟁합니다.
높아지고 커지는 것이 땅의 나라에서는 가장 바라는 일입니다.
하지만 “너희끼리는”(43절) 즉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들은
그 반대를 목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43절) 혹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44절)이라는 표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것은 커지고 높아지기 위한 전략이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낮아지고 섬기는 사람이 진실로 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45절)고 하십니다.
메시아 즉 영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낮아지고 섬기는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섬김의 절정은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대로 사신 분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여리고에 이릅니다.
여리고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곳을 떠나려는데
바디매오라는 눈 먼 거지가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 오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47절)라고 외쳤습니다.
그 사람이 계속 외치면서 시끄럽게 굴자 사람들이 그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33절)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답합니다.
그는 야고보와 요한과 달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였으므로 다른 것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눈 뜨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본다고 했지만 실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바디매오는 눈 멀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은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치유해 주셨고,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묵상:
하나님 나라는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높은 기준과 고매한 덕과 아름다운 질서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 하면 우리는 땅의 나라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땅의 나라에서 통하는 원리들은 죄 된 인간들이 서로 타협하여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좋은 제도라 해도 결국은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합의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조차도 확보되지 않는 나라들이 많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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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목사 19-02-15
-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막10:46-48
간절함이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시선들을 의식하여 꾸며진 모습으로 살아 왔는가? 남자니까 무슨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밑보이지 않기 위해서 꾸미고, 치장하는 곳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들이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던가? 신앙생활은 또 어떤가.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더 신실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던가? 나는 아직 너무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척 위장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혹은 나는 열심을 다해 찬양하고, 기도하고, 일하고 싶은데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느냐 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오늘 맹인 바디매오를 묵상하며 한 가지 발견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야한다는 갈급한 마음을 주변의 시선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예수님을 부르고 찾았다. 왜냐하면 바디매오는 간절했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쓴다고 살려달라고 외치지도 않고 물에 가라앉아 죽어가겠는가? 아니면 더욱 크게 소리질러 살려달라고 외치겠는가? 때로는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느냐 더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너무 많다. 주님 앞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나의 생명인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인가? 부디 나는 주님 앞에서 바지가 벗겨진 것도 모르고 춤을 추던 다윗과 같이 온 마음, 정성을 다해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소망한다. -
- 이형원전도사 19-02-15
-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재물이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위해 무엇을 해야할지를 묻는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답하며 그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재물 때문에 고민하며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제자들은 놀랐고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지 묻게 되는데 이 대답으로
오늘의 말씀 하나님으로써는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주신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특별히 내가 가진 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되어질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또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될 줄 믿는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에 너무 집착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 원한다. 오히려 하늘의 것을 위하여
특별히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위하여 살아가길 원한다.
그리고 이 땅에 이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이 땅을 변화시키는데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