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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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토) 눅9장_주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 느헤미야강
- 2019-03-02
- 441 회
- 2 건
1. 1-17절: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주님은 열 두 제자에게 귀신 쫓는 권세와 병 고치는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파송하신다.
제자들은 여행에 필요한 경비나 필수품들을 소지하지 않고 가도록 요구받는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지실 것을 보증하시는 것이다.
혹 그들이 받는 고난이 있다면 그것도 달게 받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 여행에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이것은 주님이 떠나신 후에 일어나게 될 역사의 리허설이었다.
헤롯은 이런 소식을 듣고는 요한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것은 그저 관심이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하신 듯 한데,
무리들이 벳세다까지 쫓아왔다.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병도 고쳐주셨다.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음식을 먹도록 이제는 보내자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에 주시는 도전이다.
결국 주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의 남자들로 된 수많은 무리를 먹이셨다.
2. 18-50절: 고백 그리고 그 이후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셨고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 하는지 물으시고
제자들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잘 대답했으나
주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제자들 자신도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더욱 그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고백이 나오자 마자,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나서 부활하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고
오병이어로 무리들을 먹이는 기적의 연속과
영광만을 생각하고는 따라갈 수 없는 길이다.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가 있다고 하심은
변화산상에서 영광을 얻으시는 주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8일쯤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는데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가 동행했다. 때는 밤이었는데,
주님은 기도하셨고 아마 제자들은 피곤해서 자고 있었다.
제자들이 깨어서 본 것은 주님의 얼굴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것과
그 옷도 광채가 나도록 희어진 것이었다.
또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별세하신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참지 못하고
초막 셋을 짓고 지내자고 말한다.
이때 구름 속에서 성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예언한 자들이다.
그리고 이제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님께 와서
그 구원의 사역(별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셨고 제자들이 보게 하셨는가?
예수님의 메시아되심 그리고 메시아 사역의 본질을 가르치신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튿날 아침, 산에서 내려오자 흉악한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고쳐주시기를 구한다.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이 능히 귀신을 내어보내지 못했던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경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놀라와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메시아에 대한 헛된 생각에 잡히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하게 되는 것은 결국 하게 되는 것은
누가 크냐 하는 수준의 자아 증명의 싸움이다.
주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 자신을 영접함이고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함이라고 하시면서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신다.
요한이 자기 중심적 생각에 사로잡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대해서 배타적 생각을 피력하자
주님은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신다.
3. 51-62 제자가 사는 법
51절은 누가복음의 분수령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기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승천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이 모든 일이 결국 예수님께서
왕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승리적 관점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심하시자,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이 고개를 든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제 당하실 일들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길에서 주님을 알아보고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신다.
주님은 무작정 환영하시지 않고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각오(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할 것을 요구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셨듯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는데 부친을 장사한 다음에 따르겠다 하자
주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가혹해 보이는 명령을 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알라는 말씀이다.
또 가족을 작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자에게
주님은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거절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앞을 바라보고 가는 자들이다.
뒤를 돌아보고 세상의 관계와 염려에 매여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묵상.
9장은 철저하게 제자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려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그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지만,
그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 이 고난을 지나라고 명하신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간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누가 크고 누가 옳으냐는 자기 증명의 싸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증명의 싸움을 하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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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목사 19-03-03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니이다 하니” 눅9:20
도대체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누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누구는 엘리야라 한다. 또 어느 누구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다시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 하느냐?” 주님은 다른이가 전해주는 예수님이 아닌 내가 만난 예수님을 물으신다.
내가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만약 누군가가 전해준 세례요한, 엘리야, 그리고 선지자를 닮은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 이시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는 죄에 종노릇 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피 흘리심으로 나의 죄는 깨끗이 씻음 받은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만이 나의 구주시요, 구원자 이시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날마다 고백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
- 이형원전도사 19-03-05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예수님께서 역설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인지 말씀하신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게 된다. 반면에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따르기를 더욱 좋아하고 추구한다.
이러한 삶의 끝은 결국 자기 목숨만을 위하여 살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반면에 주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는 그 길이 때로는 고난의 길이도 때로는
쉽게 걸어가기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그 끝에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가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내 삶을 이루어가는 것
그것이 곧 사명을 받은 자의 삶이 되어야 할 줄 믿고 그렇게 살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