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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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월) 눅10장_겸손히 깨닫고 행하라

  • 느헤미야강
  • 2019-03-04
  • 412 회
  • 2 건

1. 1-24: 제자 파송과 보고

 

누가복음 10장의 서두에 나오는 70제자의 파송에 관한 기사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부분입니다(1~20).

반면 눅9장에서 12제자를 파송하시는 기사는 공관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특별히 이 기사를 기록한 것은

누가복음이 이방인을 위해서 쓰여진 성경이라는 특성을 드러내줍니다.

12란 숫자는 구약 12지파 즉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숫자라면,

70은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70개의 민족 즉 모든 이방인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12제자 파송에 이어 70제자를 파송하신 것은

특별히 이방인 전도와 관련이 깊은 사건입니다.

 

이때 주님은 기도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2).

이들의 힘만으로는 온 세상을 추수하는 것이 부족하기에

주님은 추수하는 주인이신 하나님께 추수할 일군을

더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이 일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세계복음화의 일선에서 수고하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동일할 것입니다.

기도 없는 선교는 선교를 모르고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은 일입니다(3).

또 이 일은 긴박한 일입니다.

그래서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인사나 주고 받을만한 처지가 못 됩니다(3b).

 

주님은 또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4,7~8).

주님이 보내신 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거절한 것이고

곧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거절한 것입니다(16).

70 제자들이 얼마 만에 돌아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기쁨으로 돌아왔습니다(17).

왜냐하면 주님의 약속대로 귀신들이

주의 이름 앞에 떨며 쫓겨났고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왕이신 예수님의 도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일로 기뻐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으로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십니다(20).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얻은 신분이 무엇인지를 망각한다면,

이런 모든 승리는 실상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기뻐하셨다는 매우 드문 표현이 여기 있습니다(21).

물론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단 한 번만

기뻐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17:13).

여기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교만한 자들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이 스스로 낮음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사실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계시 없이 하나님을 알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낮고 천한 사람들, 겸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알려지신다는 사실은 주님께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려지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말입니다.

 

2. 25-37: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려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25).

그는 율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결론지어진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27).

주님은 그렇게 하면 살리라고 하셨으나

그는 자기 이웃이 누구냐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여기 주님이 하신 이야기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30~37).

이야기 속의 강도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고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대인일 것입니다.

거의 죽게 되어 버려진 이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보고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지나간 사람은 평범한 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 사람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또 돈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노라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36).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를 소극적으로 묻는 율법사에게

이웃은 적극적으로 필요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은 나의 이웃일까?

내가 그 필요를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할 수 있는 도움을 주고자 하여 그렇게 할 때,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 형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이 말씀이

당시에도 충격적 언사였다면 오늘날에도 그렇지 않겠는가?

온갖 종교적 형식으로 흠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산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3. 38-42: 분주함의 함정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초청을 받으시고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38).

이 두 자매는 나사로와 한 형제였습니다.

마르다는 언니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마리아는 주님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마음에 분이 나서 주님께 마리아를 좀 혼내달라고 구하지만,

주님은 도리어 마르다의 마음 속에 있는 분한 마음이 좋지 않다고 지적하시고

마리아가 좋은 쪽을 선택해서 하고 있다면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말씀이다. 인간적으로 우리는 마리아를 편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핵심은 주님을 섬기는 일은

음식으로 분주하게 섬기면서 우리 마음 속에는

분한 마음을 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

주님과 교제하는 것에 그 중요성을 더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교회에서의 모든 섬김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같은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적 필요와

주님과의 영적 교제를 앞서는 섬김과 봉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봉사는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마르다가 기쁨으로 그 일을 했다면 그 또한 족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불편함은 그녀가 하는 일 조차도

주님께 대한 기쁨의 섬김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언제나 영적인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다른 섬김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일을 감당하는 자는 그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기쁨으로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 이형원전도사 19-03-05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누가 나의 이웃이 입니까? 라는 율법 교사의 질문은 잘 못된 질문이다.
      누군가를 나누고 이웃 혹은 이웃이 아닌 자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을 미워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입에 담기 조차 싫어했다.
      마지막 답변을 보면 사마리아인 이라는 답변 대신 자비를 베푼 자라는 답변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모두가 나의 이웃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자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이웃을 나누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구분하기 보다는 모두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사마리아인이 일면식도 없는 강도 만난자에게 베풀었던 그러하면 자비가 나의 마음에
      그리고 나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줄로 안다.

      입으로만 베풀고 말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나의 삶의 모습 속에 이러한 모습이
      있기를 원한다. 부족하고 또 온전히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하여 어정쩡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이 있다.
      온전히 주님을 위해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가 되길 기도한다.
    • 김성민목사 19-03-0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41-42

      현대 한국사회는 멀티플레이를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학교를 마친 후에도 이 학원 저 학원을 가야 한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은 우리 아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무엇이든 잘 하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는 반대로 우리 아이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아이가 스트레스로 인해 불행을 느낀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아이가 누릴 미래의 행복을 위한 투자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가 불행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것을 모두 가지려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나온다. 마르다는 멀티 플레이어다. 마리아는 그와 반대로 한가지 일 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의 상태는 확연히 달랐다. 마르다는 불평했고, 마리아는 행복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 말고 한 가지 일로 좋으니라. 그리고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말씀을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스스로에게 좋은 한가지를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한다는 말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녀 스스로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세상의 평가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소중한 것을 잃으??모든 것을 잃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