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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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금) 마태16장_본색을 드러내시다
- 느헤미야강
- 2019-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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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파의 누룩(1-12절)
바리새파는 유대교의 평신도들 사이에서 형성된 갱신 운동이었고,
사두개파는 제사장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두 파는 서로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파가 예수님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공동의 적을 위해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걸어 넘길 구실을 찾았습니다(1절).
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2절)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도발적이고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할 만한 자격이 있음을
기적으로 입증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징조는 보지 못하고 표징을 구하는
그들에 대해 탄식하면서 돌아서십니다.
“요나의 표징”이란 앞으로 있을 부활에 대한 암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
즉 다시 유대인의 땅으로 돌아 오셨는데,
제자들은 음식 챙겨 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주의하라”((6절)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먹는 빵을 먹지 말아라”는 뜻으로 오해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위선과 허위와 교만과 불신에 대해 고민하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빵을 가져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이나 빵의 기적을 경험하고 나서도
여전히 빵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3-20)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가십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제자들과 함께 수양회를 떠나신 셈입니다.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려는
전환점에서 그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13절)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들은 대로 보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중 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 듣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그러자 베드로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16절)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보다, 율법보다, 성전보다, 예언자들보다,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은 것입니다.
“나다”(14:27)라고 말씀하신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17절)께서
계시해 주셔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예수님이 칭찬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라는 이름은 이 때부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헬라어 ‘베드로’ 혹은 아람어 ‘게바’는 바윗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고백을 교회의 기초로 삼겠다는 뜻으로 이렇게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 교회”(18절)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교회는 모두 예수님의 소유권에 있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19절)는 베드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20절).
세례 요한의 예에서 보듯, 메시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예수님의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대중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전환점(21-28)
“그 때부터”(21절)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당신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지구의 배꼽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면 예루살렘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적대 세력이 그곳에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하늘 나라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한다면
필사적인 저항이 있을 것이고,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뻔히 내다 보시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그것이 당신이 하실 마지막 사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면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라고 덧붙이십니다.
이렇게 말씀 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대들었다”(22절)고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베드로의 반응에서 분명해집니다.
베드로가 메시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대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아가 고난 당하고 죽는다는 것은 그의 신학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들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23절)고 책망하십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 받은 칭찬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로 따라 나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24-28절).
그 전까지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보고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처럼 능력과 권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하늘 나라가 당하는 운명입니다.
그것을 당해 내고 나서야 그 나라는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믿고 바라며 그분의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묵상:
나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 안에서 은밀하게
나를 조종하고 있는 ‘누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라면서 세상에서 배우고 습득한 가치관을 따라 살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누룩을 제거하고
하늘 나라의 누룩을 품는 것입니다.
그 누룩은 은밀하게, 매우 느리게 하지만
결국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눈빛과
행동에 스며 들어 변화시킵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합니까?
그 고백에 걸맞은 삶이 나에게 있습니까?
나의 믿음의 중심은 나의 꿈과 욕망과 계획입니까?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기로 방향을 잡았습니까?
예수님을 믿기에 포기한 것 혹은 내려 놓은 것이 나에게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믿음이 나에게 있습니까?
하늘 나라의 누룩으로 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사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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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원전도사 19-01-22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16:6)"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이들의 누룩은 예수님에 대하여 악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들에
대한 악한 영향력에 대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빵때문에 고민한다.
예수님의 온전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엉뚱한 것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
악한 영향력은 빠르게 퍼져나간다. 누룩과 같이 처음에 작은
부분으로 영역을 차지하면 점차 그것이 확대되어 부풀게 한다.
나에게도 이러한 악한 영향력이 내 안에 들어올 때가 있음을 느낀다.
이것을 그냥 방치하거나 허용하면 그것이 어느새 커져서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
처음부터 크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그 크기를 보고 물러서게 된다.
하지만 괜찮을 것 처럼 보이는 작은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이러한 작은 것들이 점차 켜져서 우리를 무너뜨리게 한다.
악은 어떤 모양으로라도 버려야 한다. 그것이 큰 것이든
혹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라 생각할 만큼
작은 것이든 우리는 이러한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내 삶에 누룩들을 제거함으로 악의 씨앗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 안에 정결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