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1.21(월) 마태18장_하늘나라에서 사는 법

  • 느헤미야강
  • 2019-01-21
  • 528 회
  • 1 건

1.

 1-14: 하늘 나라와 지극히 작은 사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모두 하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즈음에 제자들도 하늘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이유도

하늘 나라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혹시 예루살렘에 이루어질

위대한 다윗 왕국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 나라가 임하면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까?

아마도 제자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1).

 

그러자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부르셔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3)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된다는 말은 4절에 나와 있듯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 어린이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존재감이 낮았습니다.

서로 높아지기를 다투는 세상에서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 서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이 사회에서 무시 당하고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을

절대적인 가치로 대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5).

그것도 역시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잘 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에 대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6)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에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그 중에는 사회적으로 무시 당하고 차별 받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한다”(6)는 말은 믿음을 버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죄짓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겉으로 하찮아 보인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여

그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죄에 빠지게 하는 도구가 되지 말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중대한 죄를 저지르는 셈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6)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7)

현실을 인정하십니다.

죄성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8-9)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손이든 발이든 눈이든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제거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의 근원을 제거 하라는 뜻입니다.

죄 짓게 하는 것은 손이나 발이나 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

죄의 근원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생명”(8)영원한 불”(8)

혹은 지옥”(9)을 대조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천국과 영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지옥이 있고 영원한 형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엄연한 사실로 전제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 좋을 대로 상상 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영원한 형벌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라면

이 땅에서 아까워할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가르침을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써 마무리하십니다(10-14).

백 마리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는

그 중에서 한 마리가 보이지 않으면 찾아 나섭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누구나 같은 무게와 값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 하나님의 눈으로 대하여

누구에게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2. 

15-35: 하늘 나라와 용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로 인해 세상은 꼬이고 꼬입니다.

그것을 푸는 것이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꼬인 매듭을 푸는 지혜를 전해 주십니다.

15절 이하는 권징의 이슈를 다룹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를 말합니다.

그럴 경우 범죄한 형제를 개인적으로 권고하여 돌이키게 하되,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권고하고,

그 말도 듣지 않을 때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거부할 때 교회의 교제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말씀의 의미입니다(고전 5; 딤전 1:20).

이 권징의 목적은 범죄한 형제로 돌이켜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18~20절은 이런 교회의 적법한 판단을

주님께서 승인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9~20)”는 말씀은

문맥상 합심기도의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권징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을 확인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거듭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21).

당시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세 번 용서해 주면 충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리새파 율법학자들보다

높은 기준을 요구 하신다고 알고 있었기에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21)라고 묻습니다.

일곱의 완전수입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예수님은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22)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90번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이 대답에 다들 놀랐을 것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 무한대의 용서가 가능해지는

비밀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액수입니다.

오늘로 하자면 천억 정도에 해당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빚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이 그 종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치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다 갚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왕이 볼 때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 빚을 없애 주었습니다.

 

왕에게 그 많은 빚을 용서받고 궁궐을 나가던 중에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은 오늘로 일만 달러 정도 되는 돈입니다.

왕에게 용서받은 그 종은 자신에게 빚진 친구에게 당장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 친구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했지만

그 종은 결국 그 친구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왕은 그 종을 하옥시킵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을 말하고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빚은 죄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듭 거듭 짓는 죄는

490번이 아니라 490000000000번도 넘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상상할 수 없는 빚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상상할 수 없는 죄의 양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그 죄를 모두 사해 주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것이 믿는 자가 받은 은혜입니다.

만일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행하는 잘못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 형제가 나에게 하는 잘못이 아무리 커도

내가 하나님께 지은 잘못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받은 용서를 잊었다는 뜻입니다(35).

 

묵상:

하나님의 다스림에 마음을 열면 먼저 나의 내면이 변화하고,

내면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대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영원한 가치를 알아 보고 그것에 따라 사람을 대합니다.

땅의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을 밟고서라도 높아지는 것이 목표인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의 발판이 되어 줍니다.

그렇기에 땅의 나라에서 무시 당하고 차별 당하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임 받고,

땅의 나라에서는 높임 받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아집니다.

사실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제 위치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눈에 보이게 도드라져 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

즉 우리의 죄가 치워졌다는 뜻입니다.

죄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께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금까지 내가 하나님께 드린 상처를 모두 합하면

일만 달란트에 달합니다.

그 모든 것을 용서 받았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그를 미워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뜻입니다.

    • 이형원전도사 19-01-2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누가 천국에서 큰 자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역설적이었다.
      자신을 크다고 높이는 자가 아니라 이 때 당시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큰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천국에서 큰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그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 그 분의 역사하심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를 통하여 이루어
      지게 될 것이다.

      사역자로써 때로는 스스로를 높이고 싶어지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대접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대접받기를 더욱 원할 때도 있다.
      때로는 작은 일을 해놓고 큰 일을 한 것 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주님이 하신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될 때 내 스스로는 낮출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말 처럼 쉽지 않지만 내 안에 계시는 주님과
      늘 동행함으로 그리고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낌으로
      주님 앞에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