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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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토) 삼하20장_나를 낮추기 위한 은혜의 수단

  • 느헤미야강
  • 2018-09-22
  • 516 회
  • 2 건

1. 나를 낮추시기 위한 은혜의 수단

 

다윗이 편한 길을 선택하고자 유다 지파를 이용한 결과,

이스라엘 안에 분열의 씨앗이 심겨졌고

급기야 이것은 세바의 반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애당초 다윗의 편에 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 절반 정도였습니다(19:40).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불만 세력을 이용하여

세바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은 사실상

유다 지파 사람들의 강경한 태도에도 자극을 받은 것입니다.

그나마 다윗에게 동정적이던 이스라엘 사람들 까지도

세바의 반란에 합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2).

 

다윗은 다시 내전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이미 요압은 제쳐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본문에서 분명하게 보입니다.

요압은 주군인 다윗을 배신하여

아브넬, 압살롬을 죽인 사람입니다.

다윗은 약속대로 아마사에게 유다 전역을 돌아

민병대를 소집하게 하고 전투 부대를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에게 맡겼습니다.

 

요압의 역할은 나오지 않으며,

그는 아마도 아마사의 수하에서 섬겨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요압은

그냥 앉아서 당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기브온 큰 바위 곁에서

아마사를 속여 칼로 찔러 죽입니다(8~10).

그리고는 다시 군대를 자기 지휘 하에 넣고

세바를 추격하게 됩니다.

 

세바는 벧 마아가 아벨 성으로 들어갔고

요압은 그 성벽을 쳐서 헐어버리는 전투를 계획합니다.

이때 한 지혜로운 그 성의 여인이

세바의 목을 내어주게 함으로써

성과 성내의 모든 백성이 살게 하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이 성은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으로 알려져서 많은 사람이

지혜와 충고를 얻으려고 찾은 성이었습니다(19).

여인의 빛나는 기지는 이런 성을 구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다시 다윗의 회복된

왕국의 관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요압은 나라의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사실 요압은 다윗에게 있어서

몸의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그를 다시 임명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서도

그 죄가 우리 삶 속에 남아서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한 순간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뿐만아니라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시나

죄악에 대한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함으로서

죄에 대하여 반복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들이

우리 삶에 죄의 결과로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그어놓으신 한계를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이

다 그렇게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2. 묵상의 은혜: 권위를 지키는 법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권위입니다.

말과 행동의 권위가 없다면 공동체를 이끌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권위를 세워가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뢰관계가 하나하나

촘촘하게 연결될 때 권위가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세워진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몇 사람들이 작정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리더로서는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화도 내보고 달래도 보지만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으면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오늘 다윗에게 이런 골치 아픈 사람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압입니다. 사실 요압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군대장관으로 전쟁에 능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요압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의 말을 아예 듣지도 않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전세가 이미 기울어졌다고 판단된 압살롬과의 전투에서

부하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내 젊은 아들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해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왕의 말을 무시하고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린 압살롬을 요압이 죽였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왕에게 호통을 칩니다.

왕위를 회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은

요압을 군대장관자리에서 경질해 버렸습니다.

도저히 요압을 데리고는 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군대장관을 세우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마사입니다.

아마사는 사실 압살롬의 반란 때 압살롬 편에 섰던 유다사람입니다.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등용하는 것은

백성들이 보기에도 탕평책을 펴는 것처럼 보여서 명분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경질되자 다시 그 자리를 찾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아마사가 군대장관이 되고 출정할 때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자 아마사에게 진압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정한 기일이 지나고도 기별이 없자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때 요압은 아비새와 합세하여 아마사를 죽입니다.

 

왕이 군대장관으로 임명해 놓은 아마사를

요압은 임의로 살해해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요압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압은 아마사를 죽여 놓고

아비새와 함께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러 갑니다.

요압은 원래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뼛속부터 세포 하나하나가 단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요압이 세바의 반란을 제압하고 돌아옵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군대장관으로 세웁니다.

그러니 다윗에게 요압을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원래 요압은 성격이 거칠고 기질이 난폭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대놓고 왕의 명령을 무시할 만큼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요압이 이렇게 된 분기점이 있는데

그건 사무엘하 11장에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사건 이후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해놓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장에서 앞세우라고 요압에게 친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우리아를 앞에 세워놓고 군대는 뒤로 후퇴하고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요압은 음모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왕의 친서대로 그 일을 행했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가 왕비가 되어 있습니다.

요압은 그제서야 다윗이 이 일 때문에

우리아를 죽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요압은 다윗이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권위는 다른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무너지는 것 보다

당사자가 본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권위가 침해받을 때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집니다.

그러나 사실 그 단초는 우리 자신이 제공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오늘 다윗과 요압의 사건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리더의 권위는 리더 자신이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

삶의 자리에서 자리의 권위를 지키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요압을 통제하지 못해서

자괴감에 빠지고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히 살피고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 이형원전도사 18-09-25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삼하20장2절)"

      다윗에게는 다시 한 번 어려움이 찾아오게 된다.
      세바라하는 베냐민 불량배가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다시 한 번 내전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이 반란은 요압에 의해 진압이 되지만 그 과정 또한 다윗이
      의도한 그대로 된 것은 아님을 보게 된다.

      다윗의 모습을 보면 사울이 죽은 후 왕으로써 탄탄한 삶을 살아갔지만
      밧세바를 범하는 죄악 이후 그에게 어려움이 끊임 없이 찾아오게 되고
      휘하에 있던 요압에게 있던 영향력도 사라지게 된다.

      죄는 회개함으로 용서함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영향은 남아서 계속해서
      그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여전히 승리하지 못하고 넘어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됨을 바라보게 된다.

      내 안에 모든 죄악된 모습을 끊어 버리길 원한다.
      또 어떠한 유혹 속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길 원한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으되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에 힘입을 때 가능한 줄 믿는다.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있으며 승리를 주시는 분임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길 기도한다.
    • john 18-09-25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삼하 20:16)

      다윗을 반역한 세바로 인해 또 다시 내전을 겪을 위기에 처했던 이스라엘.
      그러나 그들은 한 지혜로운 여인으로 말미암아 전쟁을 피하게 된다.
      한 사람의 지혜와 용기가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친다는 사실을 또다시 절감하게 되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인과 같이 위기의 순간에 지혜를 발휘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언행으로 더욱 문제를 키우고 어려움을 만들어 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생명보다 사망을 낳는데 사용한다.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일까?
      그동안 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보다 나의 언행 때문에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발휘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꾀를 내 왔던 것 같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살기보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 본이 되지 못했던 때가 많았던 삶임을 고백한다.
      나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여러 은사들을 주신 분의 뜻에 맞게 사용하기보다
      나의 만족과 유익,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참 지혜롭다며 나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사용했던 지혜가, 내가 행했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심지어는 시험에 들게 하는 때도 있었음을 돌이켜 본다.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지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신중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으로 살며,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는 할 수 있는 용기를, 쉬어야 할 때는 멈출 수 있는 절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나의 삶을 통해 생명이 살아나고, 많은 이들에게 유익이 흘러가는 삶이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