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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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목) 여호수아 16장 통독가이드

  • 느헤미야강
  • 2018-06-21
  • 434 회
  • 2 건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땅분배를 기록하면서 1순위는 유다, 
2순위는 요셉의 자녀 지파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이어집니다. 
이들은 훗날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가 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그들의 기업을 따로 받습니다. 
각각 한 지파로서의 기업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에 비해 두 배의 기업을 받은 셈입니다. 
두 지파 사이에는 약간 섞이거나 므낫세에서 에브라임에게 준 성읍도 있 을 만큼 조정이 가능한 관계였습니다. 
에브람이 지파의 영토 중 게셀에 사는 가나안 족속은 
그 때 쫓아내지 못 함으로 오늘까지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알려줍니다. 

어떻게 요셉의 두 아들들이 유다 지파에 이어 땅을 분배 받았을까?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반면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서열로 봐도 한참 아래인 요셉 자손이 
유다 자손 다음으로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참 기이한 일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과거 요셉의 행실 때문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악행을 저질렀던 형제들로 인하여 극심한 환란을 겪었으나 
믿음으로 이겨내고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용서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넘어 그들을 환란에서 구원하는 자비를 베풀었습니 다.(창 48 : 17-22) 
이러한 요셉의 행실로 인하여 후대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 을 받았습니다.
가장 큰 틀은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이나 자손과 가족의 축복에 있어서 
나의 신앙이 큰 부분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 본문을 가만히 보면,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들은 첫째 아들 므낫세의 후손보다 먼저 기업을 할당받았습니다. 
이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 대한 야곱의 예언(창 48 : 1-22) 성취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는 하나님의 명령(신 20 : 16-18)을 거역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의 종으로 부렸습니다.(10절) 
누이 좋고 매부좋고! 나는 종을 부리게 되니 좋고, 그들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으니 좋고.
에브라임 족속은 큰 축복을 받고 가나안 땅에 정착했지만 결국 그들의 후손은 가나안 풍습에 물들고 
그들의 우상까지 섬기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고 끝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호 9 : 3-17)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결국 서로 망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결과적으로 에브라임보다 므낫세가 더 축복을 받았습니다.

민수기 26장;28절이하, 35절 이하에도 므낫세와 에브라임 이야기가 나옵 니다. 
야곱에게 축복받을때 장자인 므낫세를 대신해서 둘째 에브라임이 장자축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은 인구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구수대로 땅을 분배받기 때문입니다.
 
1차 인구계수: 므낫세(32,200), 에브라임(40.500) 2차 인구계수: 므낫세(52,700), 에브라임(32,500)
 
특히 2차 인구계수는 전쟁준비와 땅분배를 위한 목적입니다. 
땅 분배는 축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차조사 때는 에브라임이 더 많았는데 2차 인구조사에서는 오히려 므낫세가 2만여명 더 많습니다. 
실제는 야곱이 축복한대로가 아니라 반대가 되었습니다. 
므낫세가 에브라임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브라임이 더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쓴 나머지 교만했던 것은 아닐까? 
축복을 이어가는 힘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말씀을 순종함으로 유지되는 것임을 놓쳤던것입니다. 
에브라힘은 받은 축복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축복이 내 능력이나 공로가 아님을 알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겸손히 살았다면 
약속 누릴수 있었을터이나 그릇이 준비되지 못했기때문입니다.
반면에 므낫세는 장자축복을 받지 못했으나 원망이나 분냄대신 겸손함을 잃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특권이나 우선권을 부여 받은 사람은 더 조심해야 하고 다 된 줄로 여기면 오히려 작아져 버릴 수 있습니다. 
크게 되기를 사모함보다 바르게, 겸손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신 축복 믿음과 순종함으로 잘 감당해서 
처음도 좋으나 끝은 더 좋은 성도의 삶이 되는것이 중요하다 싶습니다.
    • john 18-06-22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되니라” (수 16:5) 

      에브라임 자손이 그 땅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다.
      이것은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들도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기보다 종으로 부리는 것이 편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이토록 느슨한 태도를 보였던 에브라임 지파는
      훗날 패역한 북이스라엘의 대명사가 쓰이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가나안 족속이 가지고 있던 우상숭배의 습성이나 하나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여러 가지 죄악 된 모습들이 분명히 에브라임 지파 가운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했던 명문 가문이
      이스라엘 분열의 중심역할을 했고, 아합과 같은 극악무도한 왕을 배출함으로
      북이스라엘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장은 문제가 없을 것 같고, 우리의 시각에서는 괜찮은 일 같아보여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남겨둔 가나안 족속으로 인해
      그들이 이토록 하나님을 떠난 족속이 되었을 줄 누구 알겠는가 싶다.
      오늘 나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결국 하나님께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합리화 하는 모습들이 있다.
      하지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 아무리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명분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것이 나를 살리고 나로 하여금 온전하게 될 수 있기에.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주어지는 모든 선택들, 모든 과정들 가운데
      내 기준과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내가 되어야겠다.
    • 이형원전도사 18-06-23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되니라(수16:10)"

      유다지파에 이어 요셉지파의 땅에 대한 말씀이 16장에 이어지고 있다.
      특별히 요셉의 지파는 2개의 지파로 그 기업을 받았는데 하나는 에브라임 지파고
      다른 한 지파는 므낫세 지파로 요셉의 아들 지파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에브라임 지파는 후에 북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지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즉, 모든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야 함에도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자신들의 종으로 만든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다.

      아마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을 쫓아 내는 대신 종으로 만드는 것이 더 유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니었음을 우린 말씀을 통해 알고 있다.

      인간적인 생각과 당장의 유익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잘 못으로 인해 그들은 죄의 씨앗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죄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보게된다.

      내 안에 완전히 쫓아내야할 죄의 씨앗이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기 전에
      내 마음 속에서 비워지길 바란다.
      그리고 당장의 내 유익과 상황만을 보고 모든 문제를 파난하기 보다는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바라볼 수 있길 원한다.

      그럼으로 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이 아니라
      모든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