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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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후의 삶을 살련다 - 눅24;13-27
- 야긴과보아스
- 201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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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6)”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31)”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33)”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35)”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수 많은 이적 기사들을 보고 들어서
나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람들.
부활의 아침에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었고,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이미 들었던 그들.
그리고 그 빈 무덤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가던 그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임재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
좌절과 절망, 그리고 충격 등은
사람들의 사고에 제한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가까이서
예수님을 본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가정할 때
“그들이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는 말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
눈이 가리어졌으미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답답함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나의 신앙 여정 중에서
그런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주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시면서부터
나를 알고 계셨고,
내가 불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과정에서도
줄 곧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셨고,
결국 나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교회로 인도하시고
중소도시로 서울로
이곳 캐나다로 인도하시기까지
지금까지의 모든 삶의 순간에
늘 곁에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난 거의 대부분의 순간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힘들어하고 있을때다 많았으니
이 본문을 보면서
엠마오의 두 제자가 아니라
그들이 바로 내 자신임을 보았기에
안타깝도록 답답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둔감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더 주님께 집중하게 만든다.
내게 강하게 들어온 글귀가 ‘눈이 가리어져서’이다.
지금 나의 눈은 얼마나 열려 있을까?
지금 나의 마음은 얼마나 열려 있을까?
지금 나의 영은 얼마나 주님과 동행하고 있을까?
다행인 것은
이 두 사람은 주님께서 축사하시고 음식을 주실 때에
드디어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고,
그 순간 그들은 이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제자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본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내 눈이 밝아져서 정말
예수님을 보고, 듣고, 깨달으면
나는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연스레 증인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하지 않고는
그 감격과 기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눈은 충분히 밝아져 있는가?
지금 나의 영은 충분히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가?
지금 나는 충분히 증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묵상을 할 때마다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한가?
아니면 가끔 생각만 할 뿐인가?
나의 삶 전체가 되고 있는가? 때때로 행하는 이벤트인가?
오늘도 나의 삶 전체를 통해
주님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다시 부활절 이후의 삶을 시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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