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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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기관이로구나 - 눅20;41-47
- 다니엘
- 2017-04-01
- 747 회
- 1 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42편)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44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다는 말씀이다.
그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는 모순일 수 밖에 없는 문장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도 잘 알고 선생까지 하는 서기관들은
성경을 읽지만 주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지 않으면서
글자에만 얽매여 있었던 까닭이다.
하나님 없이 성경연구만 한 까닭이다.
말씀을 전하고 듣지만 단순한 지식만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아 가는 것인데...
인격적인 만남 없이 지식만 주고받는다면
여기에는 아무런 변화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이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변화는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도저히 될 수 없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주님의 숨결과 임재가 경험되어져야 한다.
이런 임재를 경험하지 못할 때 나 역시
외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나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을까?
서기관들은 실상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아무런 변화된 삶도 살아내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믿음 있음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자신들은 거룩하며 율법을 공경하고 존경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긴 옷을 입고 다녔다.
원래 속이 비고 썩을수록 겉은 화려하게 되어 있다.
당시 서기관들은 랍비, 선생, 아버지, 주 이런 호칭을 받았다.
한마디로 명예와 영광을 한 몸에 받았다.
얼마나 좋았고 으쓱했을까?
그러다 보니 상석에 앉기를 즐겨했다.
서열과 순위를 매우 좋아했던 사람들.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
아마도 과부들에 대한 구제와 자신을 관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재산을 과부들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관리해주는 척하고 착복한 것은 아닌가 싶다.
가룟 유다가 따로 없었다.
나보다 어렵고 힘들고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한 마음이 없었다.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다.
길게 기도하는 것이 나쁜 것이 뭐 나쁜가?
나의 기도가 요즈음에 많이 짧아져서 안타까운데
그 마음이 외식적인 것이 아니도록 해야겠지 싶다.
길게 기도하면서 나의 태도가 아량과 덕과 부드럽지 않으면
고집이 유난히 강하면 십중팔구 외식적인 사람이겠구나.
기도는 무엇보다 내 삶을 바꾸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구별됨이 좋으나 그것 때문에 나는 다른사람과 다르다는
겸손하지 못함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결국 서기관들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대인관계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드러내고, 자기자랑을 하고
가기교만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해 버린 자들이 되었다.
나는 어떠한가?
대접받기를 좋아하는가?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좋아하나?
꽁짜를 좋아하나?
남에게 베풀기를 꺼려하나?
내 주머니에 들어오면 나가는 것이 없는가?
남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나만을 생각하는가?
겉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누가뭐래도 속으로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것이 많다.
나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모습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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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17-04-01
- 추가. 본문에 대한 신앙적 고찰
41-44절에 나타난 주님은 누구이신가?
앞 뒤 논리가 맞지 않은 것 같은 이 주는 내게 누구인가?
로마서1:2-4절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즉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 따라 나셨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라는 말씀이다.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지셔야만 하실까?
다윗의 후손을 강조하는 것은 ‘대속제물로 화목제물’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할 수 있는 피를 흘릴 수 있다는 존재라는 것이다.
피를 흘릴 수 있는, 대속제물로 드릴 수 있는
제물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피를 흘리는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다윗의 혈통을 따라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는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도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만 되신다면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만 되신다면.....
예수님은 결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고만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일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이 참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비록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따라 나신 인간이 되셨다고 해도
주님은 다른 인간처럼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즉 육신은 입었지만 나와 같지 않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말씀이 한 없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안되고
하나님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면, 대속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냥 죄인을 보고 죄가 사함을 받았노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죄인을 보고 죄에 대한 대가를 묻지 않고 그대로 용서해 버린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이 공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 말씀을 스스로 어기시는
불의한 하나님이 되시게 된다.
죄에 대해 합법적으로 심판함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인간에 대한 다함이 없는 사랑을 보이시기 위해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피흘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주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죽음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것이요, 부활하실 수밖에 없으시다.
놀랍기만 하다.
하나님의 지혜가 너무나 기가 막히다.
누가 이렇게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지혜를 발휘할 수가 있다.
참 인간이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신앙은 지나간 세대의 것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는 것.
신앙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것.
말씀이 내 인생을 변화시킬 능력임을 믿으면서 사모한다.
신앙에는 외식이 없어야 한다고 본문이 말씀한다.
서기관들의 죄악들의 그림자와 모양이라도 이 시간 있다면 주의해야겠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 함이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을 알면서도 외식하고 형식적인 사람들에 대해선
분노하시는 분이심을 본다.
외식적인 삶은 버리는 것은
단지 내가 외식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한편으로는 외식인 삶을 짤라버리고
한편으로는 주를 아는 지식속에 자라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