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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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침과 모자람사이에 선 아하스 - 왕하16장(20150707 화)

  • 느헤미야강
  • 201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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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침과 모자람사이에 선 아하스
왕하16:1-9
 
 
남유다 14대 왕 '아하스'
므낫세와 더불어 최고의 악한 왕으로 20세에 왕위에 등극하여 16년을 나라를 통치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악행만 행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을지?
왕들의 족보를 보다가 조금은 의아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웃시야’왕입니다. ‘웃시야’는 유다왕국을 부강시킨 사람입니다. 후에 나라가 강성해지자 교만하여 악행을 합니다. 어느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 하다가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대하26;16, 21). 그것도 ‘우리야’ 선지자의 강력한 만류가 있었기에 그만하기 다행이었습니다.
‘웃시야’가 나병에 걸리자 뒤를 이어 ‘요담’이 왕이 됩니다. 역대하27;2절을 보면 왕이 되어 정직하게 행하였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성읍을 건축하였고, 암몬과 싸워 이겼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바른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뒤를 이는 왕이 ‘아하스’입니다.
어떻게 16년동안 한결같이 악한 길로만 갈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는 교만하여 성전제사까지 주관하려다 나병에 걸렸으니 아들된 요담은 아무래도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앞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제사장이 주관하는 성전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성전에 대한 노이로제가 걸린것 아닐까?
문맥적으로 보면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제사를 주관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나 제사주관은 제사장의 고유한 영역이기에 아예 성전근처를 가지 않았다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있어 보입니다.
그렇게 묵상하니 ‘아하스’의 악행이 얼핏 이해되기도 합니다.
오버하다가 발목잡힌 할아버지,
성전근처에도 안 간 아버지를 보면서 아들 ‘아하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나침과 모자람사이에서 '나는 그런 무서운 하나님대신 세상을 섬기고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노골적으로 우상을 섬긴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 결과 성경은 ‘아하스’의 행적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길로 행하며’(왕하16;3).
 
남유다 왕인데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과 동급으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흰놈 골짜기에서 자식을 불에 태워 몰렉- 불, 번개, 전쟁, 역병을 가져오는 파괴의 신으로 그 신에게 제사를 드리므로 보호해 달라는 - 에게 제사를 드리고. 작은산과 푸른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정령숭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하스의 악행이 예사롭지 않아 고민이 됩니다.
할아버지 웃시야나, 아버지 요담이나 아쉬운 점 많으나 할아버지의 지나침과 아버지의 착하고 바르나 예배에 무관심한 것이 어찌되었든 ‘아하스’에게 유무형으로 영향을 미친것이 아닐까?
 
한 번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빠, 엄마를 닮아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은연중에 나타난 부모의 뒷 모습을 닮아가는구나 싶어 소름끼치도록 조심스러울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 잘 살아야겠다 싶은데 그것만으로 자녀가 바른길로 가는것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올바른 환경이 좋은 영향을 더 미칠터이나 자녀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바름을 추구하고, 날마다 말씀앞에서고, 동행하는 비결을 깨달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싶습니다.
 
예전에 성도님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적잖히 놀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두 형제를 둔 부모님이신데 아버지가 엄격하셨고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답니다. 큰 아들은 늘 정자세로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예배를 드렸는데, 둘째는 예배시간을 맞추기도 급급했고 머리는 채 말리지도 못한채 예배를 참석하여 혼나기 일쑤였답니다. 시간이 흐르고 두 아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어느날 두 형제가 자녀들과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가정예배시간만 되는 늦고 혼나기를 밥먹듯 하던 동생과 가정을 보니 공부도 물론 열심이지만 아이들이 틈날때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실한 믿음의 가정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형이 그랬답니다. 넌, 지겹지도 않냐고. 이야기인즉은 형은 바른자세, 정확한 시간에 예배에 참석했지만 마음이 함께 했던것은 아니었던것입니다. 내가 나중에 예배하나봐라, 한마디로 중심없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반면에 동생은 삶의 습관이나 스타일 때문에 늦기도 하고 많이 혼났지만 중심있는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형의 아이들이 동생의 아이들이 공부하고 말씀보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는 으레 그 또래의 아이들이 나름 시기와 경쟁심이 있듯이 한 달정도 그렇게 같이 생활하다보니 형의 아이들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동생가정 때문에 형의 가정이 변한 삶을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엊그제 큰 아이와 둘째가 큐티를 한 후 제게 묻습니다. 열왕기하 15장의 내용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가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악한길로 갔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뭐라 했을까요?
우리는 지나온 역사나 사람들을 통해서 배우고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못한다고. 역사를 되돌아보고 따라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결국은 악한길로 갔다는 한 줄 역사로 한 생애가 마쳐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좀, 어렵나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아빠가 너희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이불개라, 세수하고 큐티해라. 계획성 있게 공부하고 놀거라 해도 나무라는 것 같애서 볼멘소리만 한다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과 똑 같은거란다 했습니다.
 
잘 믿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나
무엇보다도 아이들 스스로가 하나님앞에서 바른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하나 하나 삶으로 이어나가다 보면 성숙할 날이 올거라 믿습니다.
 
여호아하스: 여호와께 붙잡히다
아하스: 붙잡히다.
 
여호와께 붙잡힌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붙잡히지 않으면 우상에게, 세상에게 붙잡히는 것이 아닐까? 그게 ‘아하스’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