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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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뎃' 을 찾습니다! - 왕하16;10-16

  • 느헤미야강
  • 201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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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두란노)을 통한 말씀큐티 순서입니다.
 
 
이 시대에 '오뎃'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당신이 오뎃입니다.
열왕기하16;10-16
 
묵상 하나.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니 12만명이 죽고, 20만명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 군사들이 포로 20만명을 끌고 사마리아로 올라갔습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축제와 환호성이었지겠지요.
그런데 선지자 ‘오뎃’이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들은 형제이다. 유다가 참패하고 어려운 일 당하는 것은 아람이나 이스라엘이 잘해서가 아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역대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대하28;10)
 
한 마디로 유다를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일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유다보다 북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니 정확히 맞는 이야기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도구됨을 잊지 않으면 언제고 얻어 맞을 각오는 해야 겠구나(?). ~^^*
멸망해 가는 나라 한 가운데에서도 ‘오뎃’ 선지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오늘 우리시대에 갈등과 폭력이 난무하고 배려와 사랑이 식어져 가는 때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외칠 수 있는 이 시대의 ‘오뎃’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구나.
엘리야나 엘리사는 소망해도 ‘오뎃’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를만큼 우리는 너무 큰 것만을 동경한 나머지
작은것 같아도 바름을 이야기 하는 ‘오뎃’이 정말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오뎃’ 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것은,
‘오뎃’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에브라임지파의 리더 몇 사람이 명령합니다.
포로와 전리품을 포기하라.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먹이고 상처난 곳을 치료후 돌려 보내도록 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타락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존중하는 지도자들이 남아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20만명과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오뎃’, ‘에브라임 지파들의 리더’
우리 안에도 많았으면 좋겠다.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 할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묵상 둘.
 
아하스가 배교를 하고 성전문을 폐쇄하고 예배를 금지합니다. 제사장이 그 일을 돕습니다.
어떻게 제사장이 그럴수 있지?
그러고도 제사장이라 할 수 있나?
마음속에 호들갑을 떨 만큼 흥분하다가도 너는? 마음속에 들려오는 그 한마디에 선뜻 손가락과 돌맹이를 내려 놓게 되는 것은 여전히 제 안에도 그와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겠이요.
 
같은 직분, 다른 삶
 
아하스의 행동에 거룩한 딴지를 거는 ‘아사랴 !’
 
웃시야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때에 목숨걸고 막고 쫓아냅니다. 나병에 들자 공동체에서 추방합니다.
추상같은 왕앞에서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면 아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우리야’는 아하스의 그릇된 행동에 앞장을 섭니다(왕하1:11).
이사야 8;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칭찬받았던 사람이었는데 이 우리야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
 
모든 것이 평온할 때 진정한 영적 리더십의 진가를 모릅니다.
폭풍처럼 역사의 회오리가 몰려올때 최고 권력자의 서슬퍼런 기세에 맞설줄 아는 사람,
결정적인 한편의 포효를 하는 사람이 참된 리더입니다.
진정한 영적 지도자는 잘못된 리더십을 막는 거룩한 브레이크가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묵상 셋.
 
아하스 통치기간에 활동한 선지가가 이사야, 미가입니다.
아하스 통치기간에 아람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셔서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사7;4) 고 권고하시고 하나님께 한 징조를 구하라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구하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사7;10-12).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징조를 주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고 징조를 주십니다.
 
아하스는 임마누엘 징조를 거부한 셈입니다.
유다를 통하여 오실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결과는 악행이며, 우상이고, 이스라엘의 왕들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함부로 무엇을 구하는 것보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나, 구하라 하실 때 참 생명을 구할 줄 아는 자로 살아야지!
왕하16장 아하스를 통해서 이런 저런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앞에서는 삶, 날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야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