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오병이어와 물위를 걸은 베드로 이야기의 연계성(마14;22-33)

  • 느헤미야강
  • 201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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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를 큐티나눔방 테스트겸,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묵상하나.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사건!
안드레를 통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린 어린아이가 놀라고,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린 안드레도 놀랐을터이나
빠르게 셈을 한 빌립이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군중들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이후 급히 군중들을 서둘러 해산시키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자신도 산에 올라 기도하시는 장면이 이 사건이후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이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과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22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급하게 군중들을 해산시키시고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을까?
그게 자못 궁금했습니다.
여기에서 '재촉하사'는 히브리어로 '아낭카조'란 말로 '억지로 ~하게 하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군중들이나 제자들도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어했고, 예수님은 억지로 등떠밀어 보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과 사명에 초점을 두면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 커다란 위기였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평행구절인 요6;14-15절에 잘 기록해놓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6:14-15절)
 
세상 사람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능력행하심을 보고 왕으로 삼으려 하였고 반면에
예수님의 사명은 거기에 있었던것이 아니었으니 위기였던셈입니다.
세상 성공과 내게 주신 사명이 다르다면 위기라는 의식을 갖는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가 아닐까를 생각합니다.
 
이 위기를 예수님을 두 가지 방법으로 극복하셨습니다.
하나는 제자들로 하여금 유혹의 자리를 벗어나게 하시고 자신도 그리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심으로 극복하셨습니다.
 
23절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의 방법이 도전을 주는 것은 기적을 베푸시고 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소리,
함성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택하신 최고의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위기는 힘들고 어려울 때나,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할 때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환호를 받을 때,
모든 것이 잘 나갈 때,
기도가 응답될 때 임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피조물인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기가 쉽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찾아온 인생의 위기를 극복할려면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묵상 둘.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묵상한 두 번째는 제자들도 위기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24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예수님께서 억지로 떠밀어 가게 한 자리에서 제자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초저녁에 출발했는데 밤 사경(새벽4~6시)이니 꽤 많은 시간을 고난당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를 깨닫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길에도 이렇게 풍랑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도 이런 풍랑이 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은혜와 도전을 받은 것은 예수님때문입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젖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막6:48)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나 고난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도하시는 중에도 보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가슴에 깊이 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현장을 보고 계시겠구나.
풍랑을 만나 괴로이 노를 젖고 있는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 계셨구나.
가족들 앞에서는 당당한 것같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나의 지친 모습을!
인생이 너무 힘들고 작은 내 어깨로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고통받는 나를 보고계셨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이것만 분명히 알아도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힘과 위로가 된것은 지켜보신 예수님께서
그 고난의 현장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14;15)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시는 것으로 그치신 것이 아니라
풍랑으로 고난당하는 삶의 현장을 정확하게 찾아오셨습니다.
보시고 아시는 것만이 아니라 아픔의 깊숙한 곳까지 찾아와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은혜인 것은
오늘도 고난받고 있는 내 삶의 자리에도 찾아오시는 분이라는 것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나갔는데,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헌신하고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낙망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찾아오실것이라는 믿음때문입니다.

하나 더 왜 그렇다면 밤 사경 그렇게 늦게서야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을까?
내 삶속에서도 종종 왜 그렇게 늦게서야 찾아오셨을까 그게 궁금했었는데
 묵상하는 가운데 주신 은혜는 이것입니다.
풍랑을 잠재우시는 일은 오직 주의 은혜로만 되어졌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그 일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예수님은 찾아오심의 역사 그 자체이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바로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정확하게 찾아오지 않으신 분.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숭배를 거절하다가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짐을 받았을 때
그곳까지 찾아오셔서 그들을 건져내신 분.
38년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병든 자에게도,
낙심 가운데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도 예수님은 찾아오셨음을 확인합니다.
그 분이 나에게도 찾아오신 분이시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인생 풍랑속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이유가 됨을 깨닫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보이신 사건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과 베드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
두 사건이 연결됨을 33절로 마무리 합니다.
 
33절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결국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오병이어 사건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이렇게 절묘하게 연결됩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동시에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분,
그 분이 예수님이시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러고보면 고난은 주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자리이며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자리가 됨을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