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선한 손 붙들고 기도하며 준비하십시오

  • 리디아
  • 2016-06-02
  • 672 회
  • 2 건
오늘 큐티 묵상 하는 중 저는 아래와 같은 것들을 깨달았습니다.

1.  애통하는 마음으로 민족을 위해 기도하던 느헤미야는 진심으로 걱정하던 그 마음때문에 얼굴에도 수심이 드리워졌겠지요.

그때에 (2절 중) 아닥사스다왕은 묻습니다.  “네가 아프지도 않은데 네 안색이 왜 그리 슬퍼 보이느냐?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게 분명하구나.”  이것은 느헤미야가 민족을 대신해 자복하고 엎드려 하나님께 올린 기도의 응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를 돌아볼때에 과연 나는 남을 위해, 주변을 위해, 내 민족을 위해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땅을 위해 대신 자복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기도한적이 있는가 반성이됩니다. 

또 난 느헤미야처럼 응답 받을만한 자세로.내용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 돌아보게도 되었습니다.  내 구할것만 쏟아놓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응답 받을만한 자세로 기도해야 돼겠습니다

2.  그 후 4절 후반부를 보면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언젠가 목사님께서 말씀 중에도 말씀하셨지만 느헤미야는 자신의 기도의 응답으로 이런 기회가 찾아왔을 그런 때에도 먼저 하나님께 아뢰는 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매사에 자신의 판단으로만 행동하는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이 태도는 온전히 모든것을 어떤 상황에서도 '인위 뚝! 신위 GO!'로 실천하는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매번 이렇게 주님께 먼저 아뢰고 행동하는가?  불행히도 답은 BIG NO였습니다. 
느헤미야처럼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려 머리를 조아려 기도하고 행동에 옮기는 '습관'을 만들어야 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러려면 더욱 기도가 생활이 되야겠죠... 이 아침 서둘러 새벽기도 자리에 나가야겠습니다.  이것부터 시작해 기도의 생활화를!! 다짐 또 다짐합니다!!!

3.  5절에서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라고 답한 느헤미야는 이어 7절과 8절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도움을 구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것은 그가 정말 많은 기도로 준비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로 여쭙고 입을 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역시 하나님 뜻으로 살려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기도에 매진하지 않고 (혹은 살짝 기도해 놓고) 그 기도 응답이 왔을 때 섵불리 행동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더욱 열심히 기도로 하나님께 제 삶을 위탁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또 해봅니다. 

이제 정말 교회로 향하렵니다.  이 새벽 주님과의 대화를 위해!!

주님 이것이 일회성 다짐으로 끝나지 않게 성령님의 도우심 허락하소서.  오늘도 온전한 기도로 저를 그리고 저의 하루를 주님께 위탁하게 하소서.
    • 느헤미야강 16-06-03
      기도응답을 받아 놓고도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응답 사인이 맞는가 묻었던 느헤미야!
      그것일 기억하고 연결시키신 리디아 님의  묵상이 놀랍습니다.
      일회성 다짐의 묵상이 되지 않도록 제 자신도 날마다 살피고
      리디아님과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지신 성도님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합니다.
    • 다니엘 16-06-03
      느헤미야2;1-10절 묵상

      1절, 수심이 없었더니
      2절,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왕 앞에 신하의 얼굴이 수심이 있다는 것은
      왕을 배신하거나 역모를 취하고 있음이 드러난 모습일 수 있기에
      당시 신하는 왕앞에서 수심을 드러낼 수 없었다.
      특히 왕이 마시는 술을 먼저 확인하고 점검하는
      느헤미야로서는 더욱 그렇다.

      이 사건의 발단은 어찌되었든
      느헤미야의 얼굴빛 때문이다.
      수심 때문이다.

      어떤 수심인가?
      예루살렘 때문이다.
      조국의 고통과 현실의 문제가 없었다면
      그럴일도 없었다.
      페르시야의 고관이면서 자신의 영화보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더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4개월동안 오직 예루살렘만 생각했고 생각한 결과 나온 근심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모르는 척,
      안들은척,
      귀을 막고 눈을 막아 버렸다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은혜도 부메랑과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누군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결코 아님을 알게 하신다.

      4절 왕이 물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때 느헤미야는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기도) 했다.

      이 또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시작점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묵도했다.
      기도했다.
      그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늘 기도하는 사람만이 정말 중요할때에도 기도한다.
      이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지금 눈 앞에 왕이 소원을 물었으니
      왕앞에 잘 보여야 하나
      느헤미야는 정확히 알았다.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것을...

      말 한마디의 중요성이 있었기에
      기도가 필요했고
      지혜가 필요했다.
      기도가 몸에 베어 있어야 한다.
      기도가 구체적이어야 겠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꿈, 계획이 구체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겠다.

      빙산은 수면위 10%정도로 떠 있는 것을 말한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뿌리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 기도했다.
      뉘 안전이라고 소리내어 기도했을 것이며,
      뉘 안전이라고 오랜 시간 기도했을까?
      아주 짧은 찰나의 기도를 했을 것이다.
      이것을 ‘화살기도’라 한다.
      화살기도도 빙산의 일각이다.
      느헤미야의 화살기도에는
      그 밑에 깊은 기도가 뒷받침되어 있다.
      금식기도, 새벽기도, 골방기도, 산기도, 철야기도, 침묵기도,
      다양한 형태의 기도가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을때에라먀
      화살기도가 의미있다.

      누구나 화살기도를 할 수 있다.
      누구라 화살기도에 응답받는 것은 아니다.
      먼저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삶의 자리가 있을때
      그 화살기도는 더욱 의미 있어 진다.
      느헤미야의 기도가 그랬다.
      막연히 그 자리는 모면하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한다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차원에서의 화살기도는 의미없음이다.

      한 성도님의 화살기도이야기를 들었다.
      가정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문가를 동원해보았으나
      해결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집의 많은 부분을 손 보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때 성도님은 기도하셨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제안한 시간보다도 짧게 문제는 해결되었다.
      성도님의 화살기도 때문에 응답하신것이 아니라
      평소에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기도가 의미있게 열매 맺은 것이다.
      마치 하나님과의 길은 관계의 회복이
      꽃의 뿌리처럼, 빙산을 떠 받치고 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처럼...

      오늘 이 모든 일에 기도가 있었다.

      기도는
      가장 현실성이 없어보이지만
      기도만큼 현실적인 일은 없다.

      기도는
      가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기도만큼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

      그리고 10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좋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흥왕하게 하는 사람이지
      무너뜨리고 관망하고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하신다.
      흥왕함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흥왕케 하는 사람으로 사는게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 공동체를 근심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근심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깨닫게 하심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