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1.10(목) 마태9장_간절한자가 주님을 찾고 만난다

  • 느헤미야강
  • 2019-01-10
  • 520 회
  • 1 건

마태복음 9장은 8장 뒷 부분의 두 이적에 이어

세번째 이적인 중풍병자 치유(1~8)가 나오고

그에 따른 교훈이 나옵니다.

마태를 제자로 부르심과 주님 오신 목적(9~13)

그리고 금식의 문제(14~17)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세 이적의 묶음인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소생 이적과

혈루증 여인의 치유 이적(18~26)

이 두 이적은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이적(27~31)

벙어리 귀신들린 자의 입을 열어주신 이적(32~34)이 나오고

뒤에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소개됩니다.


중풍병자 치유 이적(1~8).

주님은 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말씀하심으로써 문제가 되었습니다(2).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는데, 주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하나님임을

드러내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6).

주님은 병고치는 능력이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자 이 이적을 사용하십니다.

오늘날에도 병고침의 이적이 일어나지만, 참으로 그 이적으로 통하여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사하시는 주님을 만나는가가 문제입니다.

이적은 이적 자체로서가 아니라 주님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9절이하에는 주님께서 세리였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실 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의 집에서 주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종교적 경건과 무관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의원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이,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2~1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참 경건이라는 것입니다(13a;1:27;13:16).

이런 주님의 태도는 당시 종교적 경건의 형식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혁명적이었을 것인데,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렇습니다.

참 경건은 결코 모양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이 결여된 경건의 모양은 결국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드는 장애물입니다.

주님이 이로써 주님을 따라올 제자의 조건을 제시하시는데,

그것은 죄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도울 자가 아니라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자들이 주님을 따를 자들입니다.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가르침은 금식의 규례에 관한 것입니다(14~17).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주님의 제자들은 왜 바리새인들처럼 금식을 하지 않는가 물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금식할 필요가 없고 

주님이 떠나시면 금식이 필요하겠지만

그 금식은 예전의 종교적 형식이라는 옷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금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1년에 하루 금식을 명했는데

그것은 오직 속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열심을

자기들의 의무적 형식 속에 담아내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율법적 형식은

마치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옛 부대와 같아서

주님이 원하시는 참 복음의 도리를 담아낼 수 없다 하셨습니다.

율법적 의무와 종교적 경건의 틀로서의 금식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금식을 하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번째 세가지 이적(18~34) 중 첫 번째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고 12년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의 치유 이적입니다.

회당장은 존경받는 사회적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꿇어 엎드렸습니다(18).

그를 꿇어엎드리게 한 것은 물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행위였겠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사랑하는 딸의 죽음이었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아버지는 주님께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살려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집을 향하여 가시다가 12년이나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가에 손을 대 치유함을 얻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22).

이어 주님은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딸을 일으켜 살려주셨습니다.

 

두번째는 두 소경을 그들의 믿음을 통해 눈을 뜨게 해주신 이적입니다.

세번째는 벙어리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 말을 하게 하신 이적입니다.

이 모든 이적이 일어난 공통의 기반은 이적으로 축복을 받게 된 사람들이

다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는가?

인생에서 도무지 더 이상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입니다.

우리는 이런 난제를 인생에서 만나고 싶어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이런 난제를 주심은 우리를 하나님께 엎드리도록 부르시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모든 성과 촌으로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고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 주셨습니다(35).

주님께서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시면서 보신 것은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외쳤던 것과 비슷한 말씀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지도자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이제 주님은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하시던 일을 본대로 하면서 참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군이 적어서 추수를 다 못하는 상황이니,

추수하러 나가기 전에 먼저 할 것은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추수하는 주인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10장에서 제자들을 각각 파송하시는데,

그 전에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리의 모든 사역은 기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이루고 마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이 일하는 것은 마치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일하면 내가 일하는 것이지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진정한 경건을 추구할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간절히 주님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풍병자, 회당장, 혈루증 여인, 두 소경들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으로 경건의 모양은 만들 수 있어도

경건의 능력은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경건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사역의 근거와 시작은 기도여야 할 것은 가르쳐주십니다.

기도없는 사역은 열매없는 사역입니다. 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자기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 이형원전도사 19-01-12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9:21)"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댔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그 겉옷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
      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믿음은 결국 그의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정말 주님께 나아가면 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그렇다고 배웠고
      또 그렇다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내 믿음은 정말 주님께
      나아가면 그 모든 것이 고쳐질 것으로 믿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주님의 겉옷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은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 뿐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 그 분께 나아가면 나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그 분께 나아가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나의 마음 속에
      가득하여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