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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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마19장_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 느헤미야강
- 2019-01-22
- 514 회
- 1 건
1. 1-12절: 창조 원리를 따라 산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시 예수께 찾아와 걸어 넘길 구실을 찾기 위해
당시의 핫 이슈 중 하나에 대해 질문합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3절)라는
질문은 신명기 24장 1-4절에 대한 해석을 요청한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문화권이었던 당시, 율법학자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 사유를 여러 가지로 규정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예수님의 입장이 어떤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인용하여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뜻은 ‘영원한 결합’이었다고 대답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러면 신명기 24장에서 모세가 이혼 증서만 써 주면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규정한 것은 어찌된 것인가 묻습니다.
이혼 증서를 써 주라는 것은 이혼당한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 보호 장치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에 대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은
“너희의 마음이 완역하기 때문”(8절)이지
“본래부터”(8절)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최소한’ 지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정도에서 만족했지만
예수님은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은 죄성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수준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고도 문제 없다 생각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살아 갑니다.
또한 제자는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한 없이 용서하며 품어 안습니다.
그렇기에 하늘 나라의 제자에게 있어서
이혼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10절)라고 말합니다.
한 여자에게 영원히 매이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의해 다시 지어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당시 결혼에 대한 남성들의 생각이
얼마나 왜곡되었으며 얼마나 타락했던지를 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독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독신으로 살아야 할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고, 후천적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하는 것이 옳습니다.
제자는 결혼을 ‘무한대의 용서’를 실험하는 현장으로 삼습니다.
2. 13-15절: 하나님 나라와 사회적 약자
그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기도해 달라고 예수께 청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어른들의 필요를 채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어린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으면서도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주된 관심었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14절).
여기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순수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서의 어린이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장 먼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열립니다.
따라서 그 나라를 아는 사람들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마음과 손을 열어야 합니다.
3. 16-30절: 최대한의 이웃 사랑
이번에는 어떤 부자가 예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부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과 다른 율법 중에서 이웃과 관계되는 계명들을 예로 드십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은 다 지켰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20절)라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율법 규정을 잘 지켜 왔다고 믿었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 규정을 지킨 것은 하나님의 뜻을 ‘최소한’ 이룬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웃에 대한 율법적 의무를 충실히 지켰다고 장담했지만
그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이웃 사랑에 있어서 최소한에 만족하고 안주 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를 알아 보신 예수님은 그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21절).
그러자 그 사람은 근심을 하면서 떠나갑니다.
최소한의 기준을 넘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최소한의 율법적 의에 대한
그의 헛된 믿음을 허물어뜨리십니다.
그 사람이 떠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놀라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25절)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대교인들은 한 사람의 부의 분량은
곧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일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없다면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26절)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진리를 전하십니다.
구원 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따낼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선물’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를 쌓아 하나님의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고
자신을 너무 높이 본 까닭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용서 받은 자가 용서하듯, 은혜 받은 자는 은혜를 베풉니다.
그는 더 이상 율법의 ‘최소한’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능력을 따라 ‘최대한’을 향해 부단히 나아갑니다.
그렇기에 재산 축적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을 자신만을 위해 움켜 잡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부자가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빈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이 인자로서 온 세상에 대한 왕권을 가지고 올 때
새로 형성된 새 이스라엘을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내 이름을 위하여”(29절)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땅에서 희생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넉넉하고도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부자는 하나님께 부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이 땅에서 부자가 하나님 앞에 거지로 드러나고
이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자로 드러날 것입니다(30절).
그 영원한 나라를 알고 믿는다면,
이 땅에서 물질에서 자유해지고,
그렇기에 신실한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거룩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묵상: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물질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 된 본성을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창조의 섭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제자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최소한’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대한’이 기준입니다.
그 원리는 제자의 모든 생활에 적용 됩니다.
결혼 관계에서 제자는 배우자와 가족에게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의 사랑을 베풉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최소의 사랑이 아니라
최대한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노력합니다.
제자에게는 더 이상 물질이 목적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알기에 영원한 것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을 기꺼이 사용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부자일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인해 그는 부자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기 떄문입니다.
반면, 세상적인 기준으로 가난할지라도 제자는 부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오후 6:10)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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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원전도사 19-01-24
-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22)"
한 청년이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질문을 예수님께 던진다.
이 청년 율법을 다 지킨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청년이었다.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켰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영생의 비결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고자 한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이 후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음으로 근심하며 돌아가게 된다.
그 청년이 느끼는 부족함은 아마도 재물을 의지하는 그 마음에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포기못하는 이 청년의 재물과 같은 것은 무엇이있을까?
분명히 재물은 많지 않기에 크게 고민되지 않지만 내 삶을 둘러싼 다양한 것들이
나로 하여금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할 것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그 부족함이 나로 하여금 주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온전하지 못하게 한다.
내가 입술로는 하나님이 가장 우선이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내 삶의 모습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언제나 입술의 고백 뿐 아니라 내 소유를 팔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에
내가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그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실 그 때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나가는 믿음의 사역자가 되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