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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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목) 마가5장_변혁시키는 힘 예수
- 느헤미야강
- 2019-02-07
- 449 회
- 2 건
1. 1-20절: 변화는 혼란과 함께 온다
예수님과 그 일행은 갈릴리 동편에 있는 이방 마을 거리사에 이릅니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신 들린 사람인데 그 상태가 너무도 심했습니다.
쇠고랑과 쇠사슬로도 붙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연합하여 그를 배척 했기에
그는 공동묘지에서 지냈습니다(1-5절).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던지 거라사에 도착하자
곧바로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먼 거리에서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예수님은
“악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7절)고 명하십니다.
영적 세계는 물리적 세계의 거리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귀신은 위기감은 느끼고는 그 사람을 예수님께 달려가 간청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더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7절)이심을 알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정체를 묻자 “군대입니다.
우리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9절)라고 답합니다.
그 사람이 당하고 있던 귀신 들림의 현상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귀신들은 우선 자신들을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산 기슭에 놓아 기르던
돼지들에게 보내 달라고 청합니다(11-12절).
그렇게 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깨서는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아시고
그들의 청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돼지떼에게 옮겨 가자 돼지들이 발작을 일으켰고
집단적인 흥분과 발작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13절).
그로 인해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호수에 빠져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경악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용된 일꾼들이었고, 돼지떼의 주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아마도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기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꾼들은 주인들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짐승같던 사람이
제 정신이 들어 온순해져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듣습니다(14-16절).
그들은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 보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감당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천 마리의 돼지를 한 순간에 잃어 버린 것도 그렇지만,
그 모든 사태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동네에 들어온다면
그와 유사한 혼란이 계속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동네를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17절).
그들은 지금껏 살아온 그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배에 오르려 할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함께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18절).
예수님은 그의 청을 완곡히 거절 하시면서 집으로 돌려 보내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은혜를
가족과 이웃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19절).
그 말씀 그대로 그는 자기 동네뿐 아니라 여러 지역으로 다니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합니다(20절).
2. 21-43절: 예수께서 일으키시는 변화
예수님은 배를 타고 호수 서편으로 돌아 오십니다.
그곳에 다시금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듭니다.
그 때 야이로라는 회담장이 찾아와 병에 걸려
죽게 된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22절).
회당장은 회당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책임진 한 동네의 원로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향하시는데 많은 사람이 그분을 에워싸고 따라 갑니다.
그들 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로 인해 하혈을 하는 증상입니다.
율법 규정은 하혈을 하는 여자는 부정하다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그는 제사나 예배에 참여할 수가 없었고
사람들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소외된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재산만 탕진하고 말았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24-26절).
그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마지막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부정한 여인으로서 그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 틈에 끼어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치유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늘 느껴지던 하혈의 느낌이 사라졌습니다(27-30절).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열두 해 동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그 여인을 회복시켜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여인은 몰래 한 일이 들통난 것을 알고는
두려움에 질렸지만 용기를 내어 나섭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34절)고
축복해 주십니다.
“딸아”라는 부름에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느낍니다.
그 여인의 아픔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공감이 만들어 낸 말입니다.
그 때 회당장 집에서 심부름꾼이 회당장을 찾아 와서
딸이 방금 죽었다고, 예수님을 모셔 올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35절).
그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고 말씀하시고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 앞에서는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가곤 하셨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이르자 이미 곡하는 사람들이 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장례가 나면 가족의 슬픔을 도와 주기 위해
곡을 잘 하는 사람들을 초청하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곡을 멈추려고 하십니다.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절)는 말은
실제로 자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조금 후에 일어날 일을 두고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셔서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41절) 하십니다.
그러자 열 두 살의 소녀가 눈을 뜨고는 일어납니다.
그것을 지켜 본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 예수님의 능력에 놀랍니다.
묵상: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셔 들이는 것은 혼란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 혼란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동안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고 물질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던 세상이 온통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즐기던 것을 포기해야 하고,
그동안 목적 삼았던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동안 익숙했던 삶의 질서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불편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 이대로가 좋아!”라고 말합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떠나가 달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을 그들의 삶에도 모셔 들여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에 시달렸던 여인에게 일어났던 일
그리고 야이로의 딸에게 일어났던 변화가 그들에게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생명과 희망을 얻는 길인데,
많은 이들은 그동안 살고 있던 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살고 싶어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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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목사 19-02-08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막 5:3
신학생 시절 ‘팔복’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팔복’의 주인공은 거리의 전도자 최춘선 할아버지이다. 많은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것들을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폐지를 주우며,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예수 천당을 외치는 할아버지가 눈에 선하다. 무엇보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손과 발은 보는이로 하여금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 들었는가를 짐작해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어떠한 감정인지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를 보는 내내 눈물이 흘렀고 가슴에는 뜨거운 부끄러움에 어쩔줄을 몰랐다. 나는 복음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나는 정말 복음을 믿는가. 나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맞는가. 자조적인 물음들만 가득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 나는 다시 ‘팔복’의 말씀 앞에 서있다. 부끄럽게도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바뀐것이 있다면 최춘선 할아버지는 하나님 품에 안기셨고, 나는 말씀을 청년들에게 전하게 되었다. 바라는 것은 최춘선 할아버지의 열정이 나의 마음에도 타오르기를 원한다. 가진것은 없지만 든든한 두다리와 두 팔을 가지고 복음만을 외치던 모습과 같이 복음만을 전하는 자가 되고싶다. 주님,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 부족하고 연약하고 흠이 많은 사람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덮어주시고,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
- 이형원전도사 19-02-09
-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이 옷에 손을 대니(막5:27)"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그 병으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여인의 몸으로 그것도 오랜 기간 병을 앓았던 여인의 몸으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 앞까지 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여인은 그 많은 인파를 헤치고
기여이 예수님 뒤에까지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어 나음을 입게 된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보게 된다.
아마 확실한 믿음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아니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그 힘든 몸으로 그 인파를 헤치며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과연 얼마나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고 있는가 돌아보게 된다.
정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분의 옷에 손을 대기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그 분 안에서 해결 됨을 믿고 다른 것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