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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8.17(월), 오래된 자리에서 일어나라, 요한복음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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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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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7(월), 오래된 자리에서 일어나라, 요한복음 5;2-9

 

요한복음 5:2-9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1)[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한복음 5장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고, 그 주변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 가운데 특별히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한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히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표적’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중심도 단순히 “오래된 병이 나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났습니다. 이후 10절부터 유대인들은 병자가 치유된 사실보다 그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다닌 것을 문제 삼습니다. 요한은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단순히 한 병자를 치료하시는 분을 넘어,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본문은 그 사람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삶을 가장 강하게 설명하는 것이 ‘38년’이라는 시간입니다. 38년은 잠시 견디면 지나갈 정도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대부분을 병자로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반복되는 고통은 사람의 몸만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기대까지 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언젠가는 나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대는 체념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결국 현재의 상태가 자신의 운명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의 미문 앞 사람과 매우 닮았습니다.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고 사도행전 4장 22절에 따르면 마흔이 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오랜 세월 걷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그 상태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38년’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반복된 상처, 관계의 문제, 습관적인 죄, 포기해 버린 기도 제목, 또는 아무런 기대 없이 반복하는 신앙생활일 수 있습니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래되면 우리는 변화 자체를 기대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던지신 첫 질문은 의외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38년 동안 병을 앓은 사람에게 굳이 낫고 싶은지를 물으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병만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과 의지를 향해 질문하십니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사람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 자리에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익숙하고, 잘못된 줄 알지만 변화하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 여부를 묻는 질문 이상으로 들립니다. “너는 정말 새로운 삶을 원하는가?”

우리에게도 필요한 질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반드시 변화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된 신앙의 형태에 익숙해져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우리 가정은 원래 그렇다”, “이 문제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는 정말 달라지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예상과 조금 다른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낫고 싶으냐”고 물으셨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그의 대답에는 오랜 세월 형성된 사고방식이 드러납니다. “나에게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회가 오더라도 내가 늦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이 먼저 갑니다.”

그는 자신의 회복을 특정한 방법과 환경 안에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하고, 남보다 먼저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연못의 물이었지만 그 앞에 계셨던 분은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성전 미문의 사람과도 그대로 연결됩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동전 몇 개를 기대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행 3:5)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는 방법을 이미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누군가 나를 물에 넣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누군가 돈을 주어야 오늘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방법보다 더 큰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설명을 오래 듣고 계시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세 가지 행동이 이어집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라. 걸어가라.

특히 “네 자리를 들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38년 동안 그는 그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그의 무능력과 과거를 상징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전에는 그 자리가 그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됩니다. 그가 그 자리를 들고 갑니다. 자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와 그의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실패가 우리 삶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것이 더 이상 우리를 규정하거나 붙잡아 두지 못합니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야.” “나는 실패한 사람이야.” “나는 원래 안 되는 사람이야.” 이런 자리에 계속 누워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9절에서 요한은 매우 간결하게 결과를 기록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강화해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충분히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단순히 “힘내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너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자리까지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신다는 소식입니다.

 

요한복음 5장과 이번 주일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은 놀랄 만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데스다의 사람은 38년 동안 병자로 살았고, 미문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마흔이 넘도록 걷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오랜 세월 자신의 상태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생각한 방식으로 도움을 기대했습니다. 베데스다의 사람은 “나를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했고, 미문의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조금 더 잘 공급해 주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의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드로는 미문의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두 사건의 중심에는 동일한 명령이 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라.”

 

예수님은 우리를 오래된 자리에 조금 더 편안하게 눕혀 두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전 미문 앞에 조금 더 편안하게 앉아 있도록 동전 몇 개를 더 주기 위해 오신 분도 아닙니다. 우리를 일으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절망에서 일어나고, 상처에서 일어나고, 죄와 욕망에서 일어나고, 오랫동안 반복되어 익숙해진 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과 함께 걸어가게 하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월요일의 묵상은 단순히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다”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너무 오래 머물러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리가 없는가?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자리는 어디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기도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과 함께 걷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