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20(목), 누군가의 손이 되어 주라, 마가복음 2;1-12
20260820(목), 누군가의 손이 되어 주라, 마가복음 2;1-12
마가복음 2장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초기,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빠르게 퍼졌고,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막 2:1)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문 앞까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집들은 대체로 평평한 지붕을 가지고 있었고, 외부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지붕은 들보 위에 나뭇가지나 흙 등의 재료를 얹어 만든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네 사람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일부를 뜯어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자리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마가는 단순히 한 중풍병자의 치유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기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고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도
3절은 짧지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중풍병자는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다리가 되어 준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족이었는지 친구였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중풍병자의 아픔을 남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직접 메었습니다. 한 사람을 메고 이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들 때문에 길이 막혔음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중요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믿음은 내가 예수님께 잘 나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 믿음은 혼자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을 대신 메고 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주변에도 스스로 걸어갈 힘을 잃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어려운 사람뿐 아니라 낙심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 기도할 힘조차 잃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 “힘내십시오”라는 말보다 자신을 함께 메어 줄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왔지만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4절)
예수님은 바로 앞에 계셨지만 예수님께 갈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오히려 한 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관심이나 고정관념, 관계의 벽 때문에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그의 길을 막고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볼 일입니다. 네 사람은 길이 막혔다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4절에는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구체적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이들은 “사람이 너무 많으니 오늘은 안 되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갔고, 지붕을 열었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까지 내려보냈습니다. 믿음은 마음속의 생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 수고를 감수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수고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도 수고입니다. 시간을 내어 찾아가는 것,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경제적으로 돕는 것, 반복해서 넘어지는 사람의 곁을 지켜 주는 것도 수고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어느 정도의 불편함과 희생이 따릅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절)
마가는 ‘그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정확히 누구까지 포함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은 행동을 통해 보이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것, 길이 막혀도 포기하지 않은 것, 지붕을 열고 예수님 앞까지 내려보낸 것이 그들의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단순히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위해 움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 말씀은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이 말씀을 중풍병자의 장애가 개인적인 죄 때문에 생겼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관심은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장 눈에 띄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육체의 질병보다 더 깊은 차원,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십니다. 사람들은 그가 걸으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미문의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요구한 동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회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문제를 보지만 예수님은 사람 전체를 보십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속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보여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절)
그리고 중풍병자는 일어납니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12절)
처음에는 네 사람이 그를 상에 메고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가 자신의 상을 들고 걸어 나갑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자기 발로 걸어갑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평생 나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자기 발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교회의 돌봄도 마찬가지입니다. 붙잡아 주는 손은 필요하지만 그 손의 목적은 나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여 일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과 이번 주일 본문인 사도행전 3장에는 놀랍도록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중풍병자는 네 사람에게 메여 왔습니다. 사도행전의 미문 앞 사람도 사람들에게 메여 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의 사람은 날마다 사람들이 그를 성전 미문 앞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은 분명 귀하고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도움 덕분에 그는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줄 수는 있었지만 그를 일으킬 수는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의 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까지 데려갈 수는 있었지만 그를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사람을 일으키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할과 예수님의 역할을 구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3장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이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이 장면은 복음이 가진 두 가지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의 이름과 붙잡아 주는 손입니다. 예수의 이름 없이 손만 붙잡으면 인간적인 도움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의 이름만 말하면서 실제로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에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일으키십니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이 일어날 때까지 손을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3장에서는 한 사람을 주목하여 보기 시작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히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보입니다. 늘 곁에 있었지만 지나쳤던 사람이 보이고, 그 사람의 아픔이 보이고, 내가 붙잡아 주어야 할 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금 내가 예수님께 데려가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혼자 일어서기 어려워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내 도움만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고 있습니까?
오늘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끝내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 하나를 실천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