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22(토), 문 앞의 사람을 지나치지 말라, 누가복음 10;30-37
20260822(토), 문 앞의 사람을 지나치지 말라, 누가복음 10;30-37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한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지를 물으시자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
누가는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 질문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는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 자체를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해야 할 사람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 것인가였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30절)
예루살렘은 높은 지대에 있고 여리고는 훨씬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실제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상당한 고도 차이가 있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 사람은 바로 이 길에서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린 후 거의 죽은 상태로 버리고 떠났습니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신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인지, 사회적 지위가 무엇인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알아야 할 조건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도울 때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인가?” “나에게 잘했던 사람인가?” “도와줄 만한 사람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그의 조건이 아니라 그의 아픔입니다.
그 길에 먼저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1절)
이어서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32절)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두 성전과 관련된 종교적 역할을 담당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몰라서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나갔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왜 지나갔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결법 때문이었다든지, 강도가 두려웠다든지 하는 이유를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보았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어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힘들어하는지도 압니다. 기도가 필요한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가까이 가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은 사람의 아픔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발견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던 유대인들에게는 예상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33절)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역사적·종교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가까운 신앙 공동체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을 긍휼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등장시키십니다. 여기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를 보고.”
제사장도 보았습니다. 레위인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인도 보았습니다. 세 사람의 차이는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가 아닙니다. 본 다음에 무엇을 했느냐가 달랐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안됐다”라고 생각했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의 고통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참된 긍휼은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나의 행동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34절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표현은 이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았지만 거리를 두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보았고 거리를 좁혔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멀리서 사람을 보면 그의 문제만 보입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왜 저렇게 살았을까?” 그러나 가까이 가면 사정이 보입니다. 상처가 보이고 눈물이 보이며 그 사람이 왜 힘들어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가까이 감’이 필요합니다.
주일에 인사만 나누어서는 알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하고, 시간을 보내고, 삶을 나눌 때 비로소 보이는 형편이 있습니다. 사랑은 멀리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마리아인의 긍휼은 감정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34절)
그의 사랑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가까이 갔습니다. 상처를 돌보았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웠습니다.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랑에는 시간과 수고와 물질이 들어갑니다.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강도 만난 사람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번 주 목요일에 묵상했던 마가복음 2장의 네 사람과도 연결됩니다. 그들도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 직접 메었고 지붕까지 열었습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사랑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수고를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처음의 질문을 다시 꺼내십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은 다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질문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사랑해야 할 사람의 경계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경계를 정해 주시는 대신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웃이 되어라.”
그래서 율법교사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이야기였지?”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서 행하라.”
참된 말씀 묵상은 좋은 생각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누가복음 10장과 이번 주일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은 특별히 ‘보는 것’과 ‘멈추는 것’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성전 미문 앞의 사람은 하루 이틀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행 3:2) 수많은 사람이 날마다 그의 앞을 지나갔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그를 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주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 3:4)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주목하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단순히 그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본 것이 아닙니다. 멈추어 한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제사장도 보았습니다. 레위인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인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멈추고 가까이 갔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 역시 3장에 와서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에 대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성령 충만은 단지 기도를 많이 하고 뜨겁게 찬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전에는 지나쳤던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관심 없었던 사람이 보입니다. 그 사람의 아픔이 보입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 사람이 성전 문 앞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그 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면서 문 앞에 있는 한 사람을 계속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성전 밖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연결되어 있는가?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바라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행 3:7)
선한 사마리아인이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었던 것처럼 베드로도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묵상의 흐름을 돌아보면 아름다운 연결이 만들어집니다.
화요일에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토요일에는 눈을 들어 사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전 문 앞에 있는 사람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요즘 누구를 보면서도 지나치고 있습니까?
내가 조금만 가까이 가면 비로소 보일 아픔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물어보십시오.
나는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성전 문 앞에 있는 한 사람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은 막연하게 “어려운 사람을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데서 끝내지 말고 한 사람을 정해 가까이 가보면 좋겠습니다. 전화 한 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식사 한 끼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힘든 이야기를 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실제적인 필요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일어나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