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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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3(목) 먼저 다가오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7:11-17

  • 최고관리자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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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 어떻게 찾아오시는지를 잘 보여 주는 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후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문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한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됩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눅 7:12)

누가는 죽은 사람에 대한 설명보다 남겨진 어머니의 형편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은 그녀의 독자였습니다.

이미 남편을 잃은 여인이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정서적인 슬픔은 물론 당시 사회에서 그녀를 보호하고 부양할 가족마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을 살려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죽은 아들의 뒤를 따라 성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본문에는 서로 완전히 다른 두 행렬이 등장합니다.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예수님과 제자들과 많은 무리가 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는 죽은 사람을 메고 성 밖으로 나오는 행렬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생명의 주님이 계십니다.

다른 한쪽에는 죽은 아들을 메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행렬이 성문에서 만납니다.

이 만남은 누가복음의 중요한 메시지를 보여 줍니다.

죽음의 행렬 한가운데로 생명의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과부에게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수님께서 그녀를 향해 오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내가 걷고 있는 길의 끝만 바라봅니다.

“이제 끝났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나를 향해 오고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13절은 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먼저 과부를 보셨습니다.

과부가 예수님을 본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신 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순서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십니다.

사람들은 장례 행렬을 보았을 것입니다.

관을 보았을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서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뒤에 있는 눈물과 아픔까지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여기에서 사용된 표현은 단순히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정도보다 훨씬 깊은 긍휼을 나타냅니다.

그녀의 고통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과부가 예수님의 긍휼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런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그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기도를 잘해야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것이다.”

“내 믿음이 충분해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

물론 기도와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기도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울지 말라.”(13절)

이 말씀은 슬퍼하지 말라는 차가운 위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곧 그녀의 슬픔 속으로 직접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울지 마세요”라고 말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울지 말라”는 말씀은 다릅니다.

죽음의 현실을 바꾸실 수 있는 생명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멀리서 우리의 눈물을 향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눈물 흘리는 사람 곁으로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이 없는 삶을 약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물 가운데 나와 함께 울어 주시고 나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고 지나가지 않으셨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14절)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은 “가까이 가서”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언제나 거리를 좁힙니다.

아픔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자 장례 행렬이 멈춥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멈출 수 없었던 죽음의 행렬을 예수님께서 멈추셨습니다.

과부는 아들을 무덤에 묻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그 길을 돌이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길 한가운데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길까지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15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분명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이번 주 묵상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그 기적 이전에 일어난 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과부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믿음을 고백한 것도 아닙니다.

과부가 기적을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오셨습니다.

먼저 보셨습니다.

먼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먼저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기적은 죽은 아들이 살아난 것에서만 찾을 수 없습니다.

더 근원적인 기적은 절망 속에 있던 한 사람에게 생명의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16절)

특별히 마지막 고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사람들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돌보셨다’는 표현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고 방문하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인성의 진짜 기적은 단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