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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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4;1-10_진리의 영에 속한 사람은...
- 다니엘
- 2016-07-07
- 829 회
- 2 건
진리의 영에 속한 사람은 서로 사랑합니다.(요한1서 4;1-10)
당시 초대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큰 기독론적 쟁점은
예수님의 성 육신에 관한 문제였다.
하나님의 영과 적 그리스도의 영은
성육신의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도요한은 어떤 것이 바른 것인지 가르쳐주고,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권고하고 있다.
요한의 권고는 영적분력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첫째,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믿는가이다.
이 분별이 쉽지 않다.
이 분별은 은사, 연륜, 직책으로는 결코 알 수 없다.
기적과 능력을 행한다고 믿음의 증거일수는 없다.
사탄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못지 않게 잘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그리고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를 보는가이다.
둘째,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을 한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흘러 나온다.
그것이 세 번째로 나타난다.
셋째,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정말 알게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종일토록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
하나님앞에 서 있음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 중의 하나가
가족과 공동체사람들을 향한
나의 태도에서 살펴보게 하신다.
내가 하나님과 깊은 영적 사귐과 교제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이 분명하다면
가족들 특히 아이들에게 대한 내 말과 행동의 표현이
잣대가 되는 것 같다.
내가 충만하면 아이들에게 모든 것이 너그럽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영락없다.
공동체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성령충만함과 영적 깊이에 들어가 있을때는
모든 것이 여유롭고 이해되며 배려가 된다.
그러나 쉽게 분노하고 화나며 불만이 가득할때는
여지없이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내가 누구였는지를 놓칠때이다.
하나같이 성령충만하지 못할때이다.
우리는 어디에 소속되었는가에 따라
내 삶의 보장이 달라진다.
우리는 전에는 죄인이었고 세상과 사탄에 속한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 위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되었다.
잠시라도 있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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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결같은사람 16-07-07
-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속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공동체를 대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가진게 있어야 나눠 줄수 있듯이..
하나님과의 꾸준한 영적 교제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여 나눠줄수 있는 저가 될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 느헤미야강 16-07-07
- 요한일서가 처한 기독교상황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적습니다.
기독교가 영적인 종교이기는 하나,
모든 영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영도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을 구분해야 하고,
그 구분하는 기준 중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입니다.
(당시 이단의 영을 구분하는 기준은 이것이었습니다.)
한차례 이와 같은 이단이 요한의 공동체를 휩쓸고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어 넘어졌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영향을 받은 세력들이 남아 있었고,
또 그 가운데 흔들리는 성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성도들간의 중요한 지침은 사랑입니다.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했던 그간의 과정을 거쳐,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중에 남아있는 자들 중에도 많은 상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쟁후의 피폐한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살아남은 이 공동체는 서로간의 사랑으로 다시 세워져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받았고, 사랑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사랑은 절대계명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영지주의 이단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공동체를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큰 어려움을 만난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두가지 메시지 일 것입니다.
첫째는, 남아있는 세력 혹은 정리되지 못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해 주는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모호함이나 포용이 아닙니다. 분명한 선을 그어주는 것이며,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3장은 그런 측면에서 쓰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둘째는, 이단논쟁으로 전쟁터처럼 상처입은 공동체를
사랑으로 다시 세워내는 것입니다. 전쟁은 큰 상처를 만들고,
가족간에도 분열과 다툼을 만들어 냅니다.
이 상처는 전쟁이 마친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면의 상처, 관계의 상처가 서로 싸우는 중에(진리의 싸움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크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할일서 4장부터는
<서로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언급된 에베소 교회도 같은 상황에서
그런 지적과 책망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아마 이 교회가 에베소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당시 시대적으로 가장 시급한 메시지 였으나,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시급하고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갈등이 존재해왔기 때문입니다.
크게는 전쟁으로,
작게는 대립과 양극화(계급,빈부 등과 같은)로
늘 긴장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유경쟁의 시대인 지금 그것은
성장과 생존이라는 미명하에 조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이 피곤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부는 있으나, 영혼과 삶은 가난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치유하고,
이런 핍절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메시지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처럼,
자기 희생을 통한 사랑을 감행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되며
그것이 사랑으로서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공동체와 사회는 치유가 되고 회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메시지를 교회는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전부터 교회는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서로 사랑함>이 교회의 핵심 강령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예증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도 온전하지 않기에
완전한 기준의 사랑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위인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교회에서 보여지고 있고,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이것 저것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전혀 다른 가치관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비상식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초상식적인 가치관이 일어나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