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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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 (눅5:27-39)

  • 순대리우스
  • 201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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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 

종은 자유의지가 없다. 오라하면 오는 것이고, 가라하면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는 즉각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이것이 마태의 본받을 점이다. 그는 세관으로서 더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로마를 등에 업고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력도 있었다. 항상 로마의 관리들을 만나야 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더 높이 출세할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쫓았다. 이게 마태의 중심이었다.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선택하셨고, 선택받은 마태는 순종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즉각적인 순종은 그가 예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푸는 것으로 그의 감사한 마음을 증명한다. 또한 그 큰 잔치를 통한 감사함의 표현은 세리들의 삶이 넉넉했다는 방증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그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마태 이외의 또 다른 세리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과 죄인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죄인들이 있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은 만민의 구주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시다. 병든자를 치료하시는 치료자로,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한 구원자로.

    • 다니엘 17-02-07
      레위라 하는 세리!

      마태로 알려져 있는 레위이지만

      이름이 레위일수도,

      레위지파의 혈통을 뜻하기도 한다.

       

      제사장은 로마 당국에서 임의로 임명하였거나

      관직을 돈으로 사서 자리를 차지한 경우도 있었다.

      제사장이야 그렇다치지만

      레위지파는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세리라도 해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는 늘 괴로웠을 거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영광스러운 레위지파라는 자긍심과

      신앙심이 양심을 찔렀을 수 있다.

      웬지 민족과 조국, 동료들을 등진것만 같아 아팠을 것이다.


      본문 27절은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초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다’라는 원어의 뜻은

      상대방을 ‘주의 깊게 보다’ 곧 '눈 여겨 보다' 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마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셨고

      그 영혼의 아픔까지 깊이 살펴 보시고

      특별히 선택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리 마태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 사도로서의 헌신된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미 레위 자신이 예수님의 이야기와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

      수 많은 치유와 회복의 이야기들...

      레위인으로서 갈등을 갖고 있었던 그에게

      어느날 문득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부르셨다는 것,

      그에게 감히 거절할 수 없는 힘도 느꼈을 것 같다.

       

      오늘 세리인 레위, 마태를 부르신 주님의 시선.

      ‘보시고’ 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는다.

       

      세리라는 겉모습을 보지 않으신 주님,

      그 안에 있는 깊은 갈등과 아픔의 속 모습을 보신 주님!

       

      민족의 매반자, 매국노라 불리웠던 그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을 기록하여

      예수님을 소개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은 오직 겉이 아니라

      속 깊은 것까지 감찰하신 주님의 사랑덕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선입관과 편견으로 사람을 보시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현재와 함께 미래의 가능성까지 보시는 분이다.

       

      턱없이 부족한 나.

      과거와 현재를 보면 나도 세리 마태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괜찮다.

      주님은 나도 그렇게 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

      지금의 턱없이 아쉬움 많은 나로서만이 아니라

      미래의 달라질 나도 보셨을거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뭉클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힘들어도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레위’가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이라니,

      그의 이름만 부르는 것만으로도

      난 벅찬 감동이 있다.

      주님이 보는 미래에

      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마태복음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가고 싶은 이유이다.

       

      나도 주님의 그 마음으로

      사람들의 겉이 아니라

      속 마음을 살피고 헤아릴 줄 아는 이가 되고 싶다.

      전화 한통화, 문자 한 줄

      그 속에 담겨 있는 속 깊은 이야기도

      헤아리는 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