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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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보여 주는 삶 - 눅10;25-42
- 다니엘
- 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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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절의 말씀이 부끄러움과 함께 새로운 다짐으로 다가왔다.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내가 주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내가 내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내 삶을 돌아보고 싶고, 돌아보아야 된다는 마음에
이 말씀을 다시 새겨보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 목숨, 힘,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이 말이 걸린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니? 라고 묻는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너무나 이기적으로,
편리하게 해석하는 것 같다.
“내가 주님을 이렇게 사랑하잖아!”
그러고는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보일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시간을 내어 몸을 움직여 봉사하고...
가진 물질을 이용해서 헌금도 하고...
때로는 이웃을 돕기도 한다.
그리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때로는 회개도 한다.
눈물로 울면서 기도도 한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랬던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정말 사랑해서 그랬던가?
아니면 종교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사람은 쉽게 어떤 일에 익숙해질 수 있다.
즉 환경 적응 능력이 인간은 뛰어나고,
또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을 잘 보이게 하는 데는 탁월한
아니 천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 들어가면 바로
그 사회가 원하는 것을 알게 되고,
바로 그 요구에 순응하게 된다.
그래서 빠르게 적응한다.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자신의 어떠함은 접어두고
그 사회의 요구에 따르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가지 않더라도,
아니 조금은 마음이 가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 때에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정말 좋아하는 양 행동할 수 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하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정말 이 모든 행위가 주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쉽게 적응하는 능력을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많았다는 생각이든다.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누군가가 내 헌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했던적은 얼마나 많는지...
누구를 위한 헌신이었는지...
누가 삶의 주인인지...
생각하게 하신다.
사울이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제사를 하기 위해
사무엘과 약속한 시간이 있었다.
사무엘이 지체되자 적군은 강해지고,
상대적으로 사울의 군사는 동요하고
흩어지는 절박한 상황에 접하게 된다.
이러다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할 수 밖에 없는
참으로 절박한 상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이 직접 제사한다.
누구에게 드린 제사인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분명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무엘은 그 제사를 기뻐하지 않았다.
불순종이었기 때문이다.
불순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대적행위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동요하고,
군인들이 흩어지더라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승리와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기쁨이요,
그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이 때 모두가 흩어지더라도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온전히 주님만이 역사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린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드리고,
어떤 것은 드리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의미를 너무 축소해서
“마음만 드리면 되지” 라고 말하지는 않는지...
그러면서 정말 마음을 다하는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마음을 다하는 것은 정말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 스스로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지나치게 이기주의적으로 이 말씀을 축소 해석하여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이지 주의해야 한다.
경계해야 한다.
본뜻을 제대로 묵상하면
자연스레 목숨을 다하여와
뜻을 다하여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마음을 다할 때에 “목숨은 아니고요” 라고 말한다면
이미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다한다는 뜻은
반드시 순교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때로는 순교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드려야 한다.
본질적으로 내 생명이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생명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즐거움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정말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이 순교적인 삶이다.
목숨을 다하는 것은
모든 일에 종말론적으로 주님의 주권적 통치를 인정하면서
나의 삶 자체를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내 마음이 가는 곳에 나의 모든 것이 간다.
생명도 간다.
나의 시간도 간다.
나의 재물도 간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로 되돌아 감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기에 나의 것이라고 고집하며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할 때
이 모든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고
아주 쉬운 일이다.
그리고 기쁘고 당연한 일이다.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그저 순종의 감사와 받으심의 기쁨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기에 뜻을 다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묵상의 의미마저 사라질 수 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할 수 있는데
뜻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지
내가 나를 점검해 보게 하는 말씀이다.
이제 주님의 주권적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고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서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그것이 믿음을 가진 자,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당연한 것이든,
무엇이든지 소유의식이 아니라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의 주인 되심이
내 속에서 온전히 드러났으면 좋겠다.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구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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