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부자가 바늘귀 통과하는 방법

  • 느헤미야강
  • 2016-02-24
  • 1,339 회
  • 0 건
이집트에 올드 카이로를 가면
성 사루기우스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아기 예수가 피난했던 성소이다.
유다 헤롯왕을 피해
마리아는 어린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채 당나귀를 타고,
요셉은 그 당나귀의 고비를 끌었다.
이집트에 도착한 가족은 로마의 요새가 있던 석굴에 머물렀다.
기념교회는 그 위에 세워졌다.
이 교회의 내부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바늘귀’란 이름으로 불려진다.
입구의 높이는 당시 교통과 물류수단이었던 낙타가 통과하기에 적당한 높이가 아니다.
그러나 낙타가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낙타가 무릎 꿇고 등에 실은 짐을 내려 놓고 짐을 먼저 안으로 옮긴 후에
낙타는 무릎을 꿇고서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낙타는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왜 하필이면 낙타일까?
큰 것이 못 지나간다면
코끼리가 더 큰 동물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당시 낙타는 부의 상징이다.
재미있는 것은 갈멜산은 영어로 Camel Mountain이다.
바알과 싸운 엘리야. 바알은 부를 추구하는 우상이다.
그 우상을 타파한 장소가 낙타산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큰 성문을 열어놓고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을 지켰다.
그러다 밤이 되면 큰 성문은 닫아 놓고 옆에 있는 작고 나지막한 문을 열어 놓은채
군사 혼자 지키게 했다.
그래야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을 관리하기게 좋았다.
이때 그 작은 문을 ‘바늘 문’ 또는 ‘바늘귀 문’이라 했다.
사람 혼자 올때는 문제가 안 되는데 멀리 장사를 갔다가 낙타에 많은 짐을 싣고 온 사람은 곤란하다.
낙타에 실어 놓았던 모든 짐을 다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짐을 안으로 들여다 놓고 낙타가 서서는 못 들어 가기에 무릎을 꿇게 하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게 했다.

헬라어로 낙타는 카멜론이고 항해할 때 쓰는 큰 밧줄은 카밀론이다.
그래서 혹자는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은 당시 속담이요 관용구였다.
낙타냐 밧줄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이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 알고 이해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는 모두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헬라어 원문의 뜻을 잘 번역하면 이렇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들어간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낙타가 무릎을 꿇고 
먼저 자기 짐을 다 들어낸 후에야 들어가듯
밧줄이 주변의 줄을 잘라내고 가늘게 해야 하듯
대단히 힘든 고통의 결단,
잘라내야 하는 아픔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그게 어렵다는 이야기이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유대인은 통념상 부는 하나님이 주신 복의 표시였다.
부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천국의 안방을 차지할 사람으로 믿었다.
이렇게 복 받은 부자 청년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대답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절)
인간 구원의 문제,
부자가 구원받는 문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바꾸면
너희가 구원 받는 것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다.

더 뒤집으면
부자만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희들도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결론은
부자가 부자 된 의미를 모르고 재물에만 집착한다면
천국 가기는 누구보다 더 어렵다.


말씀을 되새기는 중에 든 생각이다.

나는 부자 청년은 아니었던가?
부자 청년은 많은 것이 문제였다.
그에게 많은 것이 돈이었다.
많은 것을 버릴 수 없음이 문제였던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부자이다.
나는 이 부자 청년을 ‘내 것’이 많은 자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돈,
내 시간,
내 지식,
내 자존심,
내 권세,
내 명예....

그렇다면 나도 부자이다.
적어도 이런것에는 나도 일가견이 있다.

이것 버리지 못하면...
이것들의 살을 빼면 된다.

삭개오가 이것의 살을 뺐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것의 살을 뺐다.
바울이 이것의 살을 뺐다.
바나바도 이것의 살을 뺐던것 아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살을 빼려 하다가 거짓 들통이 났다.

이것들을 살 찌우려고 하는 이들치고
신앙의 살찌움을 같이 입는 사람은 없다.
사울임금, 압살롬, 여로보암... 라오디게아 교회...

이것들에 대한 다이어트를 못함으로
자기 자신을 거대한 낙타처럼 만들어 간다....

거대한 낙타는 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좋다.
그러나 문을 통과해야 하는때는 짐을 다 내려 놓아야 한다.
짐은 안에 넣을 수는 있느나 자신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짐을 벗어야만 한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질문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니 정확히 베드로는 우리는 모든 것 버렸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물었다.
고기도 배도 그물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무엇을 얻을 수 있냐고?

버린게 맞다면,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참되게 버리고 주님을 따는 자들에게 주시는 보상이 있다.
이 땅에서 여러 배 받고 영생도 있다.

그러나 먼저 부름받았다고?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 있다.
나중 믿게 되었으나 즉시 버리는 자... 있다.